[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18-지혜학교의 기말 통지서 작성]
1.
한 학기 동안 정신없이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종강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면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학기 말에 개별 학생들의 성장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즉 통지서를 작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경 지혜학교에서 학생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통지서 작성을 앞두고 당시 선배 교사들이 작성했던 통지서를 참고하여 한 명 한 명 학생들을 떠올리며 내용을 채워 넣었다. 수업할 때에는 통지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터라 종강을 한 뒤에 순간의 기억에 의존해서 허겁지겁 써내려 갔다. 이렇게 쓰다 보니 인상 비평에 머물렀고, 수업이라는 전체 흐름 속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어냈는지, 어떤 능력이 길러졌는지, 어떤 과제를 마주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연한 일인데, 수업을 이끌었던 나 자신이 수업 내용 전달에만 급급했을 뿐 학생의 성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반복하다가 문득 이렇게 통지서를 써내도 되나 싶었다. 공교육에서의 <학생 생활기록부>는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입시 경쟁에서 평가 자료로 활용되기에 작성하는 교사도 주어진 틀에 따라 정확하게 작성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학생 당사자도 생활기록부에 어떤 내용들이 어떤 어휘로 채워지는지 꼼꼼히 따져본다고 한다.
그럼 지혜학교에서는 통지서를 왜 쓰는 걸까? 어떤 목적이 있을까? 만일 그런 목적이 있다면, 매 학기 내가 학생들을 지금처럼 사실상 ‘인상 비평’하는 일이 그 목적에 어울릴까? 2017년 이후 학교 교육과정 연구에 관한 실무를 맡아서 뛰어다닐 때 즈음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2.
어떻게 보면 뻔한 물음이다. 사실 누구나 쉽게 그 답을 떠올릴 수 있다. 특정 기간에 이루어진 교육활동에서의 성취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학생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학생의 성장을 객관화하는 것,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가릴 것 없이 교육이라는 활동에서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즈음 몇몇 동료들과 함께 수업 컨설팅 전문가를 섭외하여 ‘계획-운영-평가-환류의 순환 체계와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당시에 우리가 작성하던 수업계획과 통지서에 대한 점검도 받았다.
그러면서 2020년 대대적인 교육과정 개편을 시도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역량중심 교육과정이다. 2020년에는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학교 교육에서 주요 목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11가지 핵심 역량을 배치하고 각각의 교육활동의 목적을 이 역량들로 설정하는 것도 시도했다. 여태껏 여러 교사들이 각자의 자신만의 수업 목적과 그에 따른 평가의 틀로 수업을 운영해 왔다면 이제 공동의 역량을 중심으로 각각의 수업, 교육활동들을 유기적으로 이어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학교 차원에서 공통의 평가의 틀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각 수업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한다면, 개별 학생들의 활동과 그 성취와 과제들도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3.
여기까지가 지난 시기 지혜학교에서 통지표에 관한 고민과 그에 따른 시도의 과정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하다. 학생 평가를 이렇게 해도 될까? 어떤 것을 더 많이 알고, 또 더 잘할 줄 아는 것이 곧바로 인간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개별 역량들의 성취 정도를 나열하는 것 말고, 그 온전한 한 사람의 ‘성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그전에 도대체 무엇을 두고 사람이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가지고 지난 통지서들을 들여다보면 충분한 답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바로 ‘자기 평가서’이다. 교육청에서 배포한 <학생 생활기록부> 작성 요령을 보면, 중 학생 당사자의 주관적인 기술은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용이 입시 경쟁에 있어서 <학생 생활기록부>의 내용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반면 지혜학교에서는 통지서 마지막 부분에 스스로 한 학기를 돌아보며 자신의 학교 생활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칸이 있다. 여기 지혜학교 재학생인 A가 1학년, 4학년을 마무리하면서 쓴 각각의 자기 평가서 중 일부를 견주어 보자.
“내가 학교를 지금까지 다니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와서 다녔지만, 지금은 이 대안학교에서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다닐지, 내가 어떤 재미로 학교를 다니고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등 대안학교에 대한 호기심도 생긴 것 같다. …… 그리고 내가 처음 지혜학교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나 이야기하는 걸 잘 못해서 발표하는 것이 용기가 없었는데 여기서 계속 지내다 보니 발표할 일이 많아져서 어느새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말하기 전 떨리긴 하지만 말하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주 부모님께 의지했는데 이제는 선생님에게도 고민을 말하고 더 나아가 친구들과 함께 고민 상담을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나는 많이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변한다"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한층 더 성장한다는 말은 괜찮은 것 같다.”(A학생, 1학년 2학기 자기 평가서)
“이번 2학기를 포함하여 올해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을 끄적여 보았는데, 이번해는 어느 해보다 특별하게 다가온 듯했다. 왜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 이번에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잊지 못할 것 같은 경험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끊임없이 느꼈으며 변화와 변수를 마주하기도 했다.... 영화를 찍고 나서 내가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이 들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 말해주었을 때 나는 놀랐다. …… 영화에서 내가 계속해서 욕심을 냈던 것은 내가 상상한 것을 표현해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반장을 하면서 나에게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항상 자신감 없는 나지만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학습을 이끌어 가면서 배운 것이 나의 삶 속에 녹아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는 삶에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느끼는 학기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A학생, 4학년 2학기 자기 평가서)
3년을 사이에 두고 쓴 자기 평가서를 보면 몇 가지 변화들이 보인다. 1학년에는 학교에 적응하는 자신의 심경이나 학교 생활 중 몇몇 인상 깊은 장면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했다면, 4학년에는 주요 장면들과 그 장면들이 지니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4학년의 평가에서는 몇몇 경험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자기 이해’를 촉진하는 의미들을 길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들을 읽을 수 있지만, 내가 눈여겨보는 점은 바로 ‘경험의 중요성’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모습이다.
마치 이런 상황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서점에 가서 손에 잡히는 서양철학사 책을 펼쳐보자. 항상 맨 앞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기원전 7세기 경, 그리스 지역 밀레토스 사람으로서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Thales)이다. 그는 눈앞에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 이면에는 어떤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이때의 질서란 당대의 많은 이들이 믿고 있었던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 앞의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묻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모든 현상이나 질서를 이루는 ‘근원’(archē)이었다. 근원을 이해함으로써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을 일관되게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며, 이렇게 근원을 묻는 일은 신화적 이야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철학적 태도였던 것이다.
다시 자기 평가서를 들여다보자. A학생이 1학년이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의 학교 생활을 평가하면서 인상 깊었던 일, 기억에 남는 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나열하고 있다. 반면, 4학년의 평가서에서는 여러 일들을 나열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을 인용한다. “삶에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으로 그는 자신의 학교 생활의 의미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경험이라는 말이 지니는 교육적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학생이 ‘경험’의 의미를 자신의 생활을 평가하는 ‘근거’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경험’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 경우를 볼 때, 한 사람의 성장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는 바로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잣대’를 스스로 생각하고 설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서사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탄탄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단순히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을 많이 알고, 또 어떤 기술이나 기예를 잘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를 확장하고, 문제를 생각하는 ‘관점’을 입체적으로 형성하며,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를 세밀하게 다듬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정신적인 '토대'의 변화야말로 한 사람의 성장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런 생각이 받아들여진다면, 여러 교육활동에서 우리의 학생들이 어떻게,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보고 이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뒤따른다. 물론 그러한 기술적 방법 이전에,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비로소 이런 성장의 싹들이 보일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