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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크라테스의 자녀교육

by 교준

1.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의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늘 북적였다. 시장 바닥에서 젠체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에 열광하며 그를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플라톤과 같은 인류 역사의 걸출한 철학자도 있었고, 당시 아네테를 정치적 혼란에 빠트린 크리티아스와 같은 야심 많은 정치가도 있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이들이 시민들을 모아서 법정에 세운 사건이 저 유명한 책,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배경이다.

지난 겨울에 “학교 밖 독서세미나”에서 지혜학교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변론�을 함께 읽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듯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으로 �변론�을 보니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새로웠다. 바로 ‘자녀 교육’이었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목을 읽다가 가벼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왔다. “30년 넘게 가정은 내팽개치고 밖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몰려 다니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집에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아니었겠네요!” “악녀로 알려진 크산티페가 얼마나 속이 상하고 답답했으면 구정물을 소크라테스에게 뿌렸겠어요?” “밖에서 이렇게 젊은이들을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니라고 했지만) 가르치고 다니느라 정작 자기 자식들은 제대로 가르칠 수 있었을까요?”

이 말을 들으면서 ‘그랬겠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하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집 밖에서(‘겉’으로는) 철학자들의 온갖 있어 보이는 말들을 꺼내어 설명하지만, 집 안에서는(‘속’으로는) 그것과 거리가 먼 생각과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잠시 떠올렸다.


2.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이나 철학 작품들을 보면, 몇몇 겹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자식이 아비에게 대드는 모습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 �구름�을 보면,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젊은이, 페이딥피데스가 자신의 아버지 스트랩시아데스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스트랩시아데스: 어이쿠, 어이쿠, 이웃들과 친척들과 같은 구역민들이여. 얻어맞고 있는 나를 힘을 다해 도와주시오! 아아, 내 머리, 내 턱!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이 못된 녀석. 네가 아비를 쳐?

페이딥피데스: 그래요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 보십시오. 녀석은 제가 아비를 쳤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

페이딥피데스: 아버지께서 제 말(語)을 가로채셨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먼저 묻겠는데, 어릴 적에 저를 때리셨나요?

스트렙시아데스: 물론 때렸지. 너를 사랑하고 염려해서 말이야.

페이딥피데스: 그럼 말씀해보세요. 제가 염려하여 아버지를 때리는 것도 정당하지 않겠어요? 염려하는 것이 때리는 거라면.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몸은 매를 맞아서는 안 되는데 제 몸은 왜 맞아야 되죠? 저도 자유민으로 태어났어요. 아이들은 맞아도 아버지는 맞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버지께서는 아이들이 맞는 것은 관습이라고 말씀하시겠지만 저는 이렇게 반박하겠어요. 노인들은 도로 아이들이 된다고. 그래서 노인들은 실수할 경우 잘못이 더 크니까 당연히 젊은이들보다 더 심하게 매를 맞아야 한다고 말예요. (�구름�, 1320-1420행)


이 장면을 함께 읽은 부모들은 화들짝 놀라며 ‘지혜학교에서 다른 것은 다 좋으니, 아이들에게 이 작품만은 읽히지 말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다. 헌데 어쩌나. 여기, 플라톤의 �에우튀프론�도 있다. 여기서는 에우튀프론이라는 혈기왕성한 청년이 실수로 노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인자로 고소하러 가고 있다.


소크라테스: 한데, 에우티프론! 당신의 경우는 무슨 송사이오? 당신은 피고의 처지요, 아니면 원고의 처지요?

에우티프론: 고소한 처지입니다.

소크라테스: 누구를 말이오?

에우티프론: 그분을 고발함으로써 또 한번 제가 미친 걸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무엇 때문이오? 날아가기라도 하는 자를 고발한게요?!

에우티프론: 날아가는 것과는 인연이 머십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연로하시니까요.

소크라테스: 그분이 누구이신지?

에우티프론: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소크라테스: 보시오, 그대의 아버님이시라고?

에우티프론: 바로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죄명은 무엇이며 무엇에 대한 소송이오?

에우티프론: 살인죄입니다.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그럴 수가! 에우티프론, 실은 도대체 어느 게 옳은지를 많은 사람은 알지 못할 게요. 나로서는 이런 일을 옳게 처리 한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혜에 있어서 상당히 진보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오. (�에우티프론�, 3e-4b)


위에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대드는’ 장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들이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때리거나(사적 처벌) 고소를 하여 공공연하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공적 처벌) 몰아 세우는 장면이다. 모든 작품들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식들의 폭력을 안팎으로 겪어야 했던 당시 아테네의 부모들은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소크라테스가 길바닥에서 자기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며, 아비를 고소하는 아들에게는 잘못이 있다고 따끔하게 혼내기는커녕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이란 어떤 문제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느긋하게 묻고 있는 꼴을 보면 부모로서 눈이 뒤집힐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3.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직접 이야기 하는 장면은 드물다. 소크라테스의 운명이 결정되고, 죽느냐 사느냐로 사람들과 씨름하는 장면에서 ‘자식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스쳐 지나간다.

첫 번째 장면은 �크리톤�에 나온다. 사형 집행 전날 허겁지겁 감옥으로 달려 온 오랜 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출하자고, 아직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설득한다. 그 설득의 이유 중 하나가 ‘자식 문제’이다. ‘자네가 이렇게 꼿꼿하게 죽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도대체 자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겐가?’ ‘아비로서 자식을 잘 돌보고 키울 책임도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의 설득에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대화 상대자로 여기고 이렇게 자신에게 되묻는다.


(이곳을 도망쳐서) 자식들을 텟살리아로 데려가 양육하고 교육시키려는 것은 그 애들을 외국인으로 만들어 그 애들이 외국인으로서의 혜택도 누리게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대신 그 애들이 이곳(아테네)에서 양육될 경우, 그대가 떨어져 있어도 살아만 있으면 그 애들이 더 잘 양육되고 더 좋은 교육을 받게 될까? 그대 친구들이 그 애들을 돌봐줄 테니까. …… 그대 친구라고 말하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자들이라면, 그대는 그들이 돌봐줄 것이라고 믿어야겠지. (�크리톤�, 54a-54b)


살면서 하고 다녔던 말들을 모조리 부정하며 감옥을 탈출하여 목숨만을 부지한다고 한들, 그렇게 내 아이들을 외국으로 데리고 나가서 가르치고 키운다고 한들 무엇이 더 나아질 것인가? 내 아이들은 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이곳에 남아있는 편이 낫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나의 친구들이 내 아이들을 돌봐 줄 것이며, 아테네의 법과 제도, 관습 속에서 내 아이들은 아테네의 시민으로 자라날 것이다. 내가 아테네에서 시민으로 자라났던 것처럼.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자식을 키울 때에는 ‘아테네라는 공동체 속에서 네 자식, 내 자식 가릴 것 없이 시민으로서 함께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한채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변론�의 가장 마지막 구절이다.


나는 그들(소크라테스의 사형에 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 아들들이 장성했을 때 훌륭함보다 돈이나 그밖의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싶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안겨준 것과 똑같은 고통을 그 아이들에게 안겨줌으로써 복수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젠체하면, 내가 여러분을 나무랐듯이, 그 아이들이 해야할 일은 소홀히 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데도 자신들이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고 나무라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나도 내 아들들도 여러분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는 셈이 될 것입니다. (�변론� 41e-42a)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면서 끝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에게 뒤돌아서서 당부했던 말이다. ‘내 아이들을 지켜보라. 다 자라서 정신의 훌륭함이 아니라 돈이나 권력 따위에 관심을 쏟는 것을 본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했듯이 그렇게 당신들이 내 아이들을 괴롭혀라. 복수를 하라.’

적들에게 내 아이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늑대가 우글거리는 소굴에 내 아이들을 던져 놓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이 죽은 뒤 남은 친구들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야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어떻게 적들에게 내 아이들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정당한 대접’이란 말인가?

�크리톤�과 �변론�의 저 구절들을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야 나는 더듬더듬 생각할 수 있었다. 나의 동지들도, 적들도 모두 ‘아테네 공동체’를 이루는 시민들이다. 그리고 내 아이는 정치적 입장과 진영을 넘어서 ‘아테네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돈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돌보는 ‘훌륭한 시민’으로 자라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려는 당신들이 ‘또 다른’ 소크라테스가 되어서 내 아이들에게 ‘영혼의 훌륭함’, ‘삶과 생각의 일관성’,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을 요구하라. 당신들이 먼저 훌륭한 시민으로 거듭나서 아테네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가꾸어 달라. 그러면 나의 죽음도, 남겨진 내 아이들의 삶도 정당하게 대접을 받은 것이 될 터이다.

소크라테스의 자녀교육법은 이런 것이다. 내 아이를 잘 키우려면, 나와 내 아이가 속해 있는 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말인즉슨, 나와 죽기살기로 갈등을 겪고 있는 저 사람들도 이 곳을 함께 돌보고 가꾸는 ‘동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사람들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맡기면서 자신이 기울였던 정신의 노력을 ‘함께’ 기울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입장과 관점이 다르더라도 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함께 애쓰는 동료들 사이에서 내 아이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어엿한 시민으로 자라날 것이다.

아! 크고 작은 인간적 갈등 속에서 내 아이가 잘 자라는 것에 눈길이 먼저 가는 나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글귀’들을 이리저리 짜맞추어 볼 수는 있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는 도무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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