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년 간 나는 청소년들과 철학으로 무엇을, 어떻게, 왜 씨름했나?
2012년 9월, 박사과정 입학과 동시에 철학 대안학교인 '광주 지혜학교'에서 철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의 자격으로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참고로 지혜학교는 2010년도에 개교했다. 개교 당시에는 연구소가 없었다가, 학교의 철학교육 커리큘럼 및 교육방법론에 관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 아래, 2012년 초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초대 소장은 <책문>의 저자, 김태완 선생님이었다.)
당시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광주의 초·중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강의를 기획하고 이끌어 본 경험을 크게 부풀려서 이력서를 채웠다. 그때에는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무슨 뜻인지도 모를 생각들을 겁 없이 말하고 다녔었다.
“자유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곳은 다름 아닌 교육현장입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인간다움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데, 그 인간다움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교육활동이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면 교육의 내용도 자유이어야 하며, 방법 또한 자유를 원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만만치 않은 생각거리들이 쌓여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심사들을 가지고 직접 교육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면서,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생각입니다.”
운 좋게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고, 2학기부터 곧바로 1개의 독서 수업과 2개의 고전 읽기 선택 수업을 개설해서 진행했다. 학생을 만난 지 열흘 정도 지났을까?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비로소 어떤 곳인지, 여기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뒤늦게 서야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지혜학교에서 나는 한 학기에 16주 간 수업을 이끌어야 했고, 수업에서 만난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도, 다음 학년에도 계속 학교를 다닌다.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학생을 대상으로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의 청소년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계획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나를 포함한 연구소 구성원들의 경험치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나는 광주 시내 곳곳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회성 특강이라든지, 4회에서 길어봤자 12회 분량의 수업만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나와 동료 연구원들이 겪은 가장 긴 철학교육 커리큘럼이라고 해봤자 4년 길이의 ‘대학 학부 과정’이 전부였다. (대학원은 여러 특수성이 있으니 제외시키자) 내가 생각하고 기획할 수 있는 수업의 폭과 깊이도 딱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막막했다. 마치 운전면허를 취득한 다음날 곧바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진입하는 두려움이랄까? 또는 짧은 메모나, 에세이를 몇 편 써낸 경험만으로 긴 호흡으로 탄탄한 논문이나 장편 소설을 쓰는 작업에 뛰어든 당혹감이랄까.
화들짝 놀란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온-오프라인에 올라와 있는 철학교육 관련 책들을, 할 수 있는 한 긁어모았다.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뒤졌다. 그리고 낙담했다. 당시에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현재까지도) 철학교육이나 철학수업을 다룬 책들로는 (1) 인물이나 주요 사상에 대한 간략한 요약글, (2) 철학 개념어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에세이, (3) 주제별 철학 토론 수업을 위한 수업 자료 및 지도서, (4) 전통적 철학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분석하는 교과서, ⑸ 개별 철학 고전들을 쉽게 풀이해 놓은 입문서 등이 있었다.
수준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학년에 따라 배치해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런저런 싱싱하고 건강한 음식 재료들을 아무 생각도 없이 한 통에 넣고 펄펄 끓인다고 하여 저절로 요리가 되는 게 아니듯이, 시중에 나와있는 이런저런 철학교육에 관한 책을 학년과 수준에 따라 차례대로 배치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6년제 대안학교의 철학교육 커리큘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곳이 한국의 청소년 철학교육의 최전선 중에 하나였구나.' '한국의 어디에도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철학을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에, 청소년기 6년 동안 오롯이 적용할 수 있는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구나.' '이 현장에서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지혜학교에 맞는 철학교육 커리큘럼을 세우고 세부 내용을 채우는 교재를 만들어 내야 하는구나.'
그로부터 12년이 흘러 2024년이 된 지금, 과거 연구소의 동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고 이제 나 혼자 남아 1인 연구소를 지키고 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지혜학교의 철학교육을 지탱하는 번듯한 철학교재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허비한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12년 간 철학교육에 관한 고민과 실험, 숱한 시도와 대부분의 실패, 그 속에서 건져 낸 약간의 성취에 대한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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