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호퍼 Mar 12. 2021

미국, '헌법'의 끈으로  묶이다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가혹했던 자유와 독립의 대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13개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연방'을 구성했다. 하지만, 단일 국가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에 불과했다.


1776년 5월 10일, 제헌의회는 13개 식민지에게 각각 자체적인 정부를 구성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미국 최초의 연방헌법이라고도 불리는 ≪연합과 영속적인 연방에 관한 규약 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이 1777년 11월 대륙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 연합규약이 13개 주 모두의 인준을 받기까지는 4년이나 소요되었다.


이처럼 느슨한 형태의 ‘연합규약’에 따라 구성된 중앙정부 체제는 본질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는 관세를 부과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없었고, 심지어 외교 활동에 있어서 전권(專權) 조차 갖지 못했다. 당시에는 13개 주 정부 대부분이 독립적으로 외국과 외교 협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통의 화폐도, 중앙정부 차원의 군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9개 주는 자체적으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주는 해군력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허울뿐인 중앙정부였던 것이다. 조지 워싱턴의 표현처럼 당시 13개 주들은 '모래 밧줄'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 미국 시민권 시험에 “미국 초창기 13개 주가 어디 어디냐”는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다.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각 주의 지나친 독립성과 강력한 권한은 연합회의를 무능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당연한 이치다. 그 결과 연방정부는 허약함과 한계를 드러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경제적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각 주의 개별 행동으로 연방정부는 갈지자걸음을 하는 형국이었다. 건국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지역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공동체의 총체적인 이익을 파괴하고 있다”라고 우려하면서 “그들이 인민의 대표이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교모임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게다가, 1783년 파리조약의 체결로 영국과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영국군은 여전히 오대호 주변에 주둔하면서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양도받은 에스파냐는 미시시피 강 항해권을 제한하려 했다. 미봉책으로 20년간 미시시피 강 항해권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남부의 주들은 항해권을 포기할 수 없다며 에스파냐와의 조약 비준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연합에서 탈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외문제뿐만 아니었다.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발행한 공채의 상환 시기는 점점 다가오는데 연방정부는 이를 상환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독립적인 조세권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것만이 아니다. 설상가상 밀린 봉급을 받지 못한 제대 군인들의 불만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언제라도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미국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산업은 잿더미로 변했다. 영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사라지자 수출길이 막혔고,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미국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각 주는 파산 직전에 몰린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세금을 앞 다퉈 인상했다. 주민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고,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셰이즈의 반란

사병들은 수개월간 월급도 못 받고 형편없는 음식에 군화도 없이 행군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도 약속된 퇴직금조차 받지 못한 채 퇴역한 군인에겐 과중한 세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버지니아, 메릴랜드, 뉴햄프셔, 델라웨어 등지에서 작은 반란과 폭동이 연이어 발생했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프랭클린 공화국'을 세우려는 분리 독립운동까지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나폴리스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786년 2월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햄프턴에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데니얼 셰이즈 Daniel Shays 대령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셰이즈는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에게 받은 칼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리자 반란을 일으켰다. 1년 가까이 이어진 이 반란은 겨우 진압되었다.

▲ 셰이즈의 묘비(좌) 하단에는 독립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전투명이 새겨져 있다. 우측의 일러스트는 반란 기간 동안 일어나 싸움을 표현한 것이다.(Getty Images)

셰이즈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끔 조그마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정치세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마치 자연계에 가끔씩 폭풍이 부는 것이 필요하듯이,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제퍼슨의 안이한 인식과는 달리,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므로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그 결과, 셰이즈의 반란 전에는 미국연합 13개 주에서 7개만이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 참석 의사를 밝혔지만, 반란 후에는 13개 주 모두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1787년 2월 21일, 마침내 연합회의는 필라델피아 회의 소집을 승인하고 미국연합의 모든 주들이 참여하는 역사적인 헌법제정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서 헌법이 만들어지고, 대통령제가 발명되었으며, 지금의 대통령 선거제도의 근간이 형성된 것이다.


<참 고>

제목의 배경 그림은 미국 독립전쟁을 다룬 영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의 포스터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로, 독립전쟁 당시 '늪속의 여우'라는 별명을 지닌 실존인물 프랜시스 매리언의 활약상을 멜 깁슨이 연기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늪속의 여우’라 불리는 벤자민 마틴(멜 깁슨 분)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농부다. 오랫동안 계속돼 온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참전해 프랑스군과 인디언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미국의 전쟁 영웅이기도 하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더 이상 전쟁에 가담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대신 7명의 자식들을 홀로 키우며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러나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벤자민의 혈기 왕성한 첫째 아들 가브리엘은 독립투사가 되기를 자처하며 전쟁에 참여하지만 아들을 말리지 못한다.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가브리엘이 집에 돌아오고, 벤자민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피신시켰으나, 테빙턴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대가 들이닥쳐 둘째 아들을 사살하고 가브리엘을 끌고 간다. 아들의 죽음에 벤자민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민병대를 모집하여 계속적으로 승전보를 알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립, 새로운 국가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