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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호퍼 Mar 13. 2021

필라델피아의 기적

위태로운 조국의 운명에 숨결을 불어넣다.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의 시작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적인 '헌법제정회의 Constitutional Convention'가 열렸다. 13개 주로부터 선출 55명의 대표자 모두는 식민지 정부나 주 정부에서 공직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81세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제외하곤 대부분 젊은 나이였지만, 역사와 법률은 물론 정치사상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우리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고 있는 두 명의 저명인사는 이 회의에 불참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있었고, 존 애덤스는 영국 대사로 런던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매디슨은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기 11일 전인 5월 3일 필라델피아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는 이 회의를 위해 두 개의 보고서를 미리 준비해왔다. 첫 번째 보고서는 전 세계 공화국의 역사를 정리한 보고서였고, 두 번째는 연합규약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정리한 내용이었다. 제임스 매디슨에 이어 버지니아 대표인 조지 워싱턴은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1787년 5월 13일 도착했다.


필라델피아 회의를 주최한 펜실베이니아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리더로 8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펜실베이니아 대표단과 버지니아 대표단을 제외한 나머지 주의 대표단은 긴 여정과 궂은 날씨로 회의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다. 준비성이 많은 제임스 매디슨이 속해 있는 버지니아 대표단은 다른 대표단이 모두 모일 때까지 매일 오전에는 버지니아 안을 논의하고, 오후에는 주 의사당에 나가 새로 도착하는 대표단과 면담했다. 정식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버지니아 안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인 것이다.

▲ 1787년 헌법제정회의 당시 55명의 대표자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이 묘사된 기념우표로 1937년 연방헌법 제정 150주년을 맞아 발행됐다.

1787년 5월 25일, 역사적인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  회의가 열릴무렵13개 주의 대표단이 모두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 7개 주의 대표단 29명만이 모였고, 이로써 겨우 과반수 의석을 충족할 수 있었다. 첫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나머지 대표단이 속속 도착했지만, 로드아일랜드는 끝내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북미 식민지의 반항아인 로드아일랜드는 강한 중앙정부를 만드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한 각 주의 대표단 55명이 헌법제정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한자리에 모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헌법제정회의의 내용은 최종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헌법제정을 위한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된 것이 현재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매디슨은 후일 이렇게 회고한다. “만일 회의가 공개로 진행되었다면 연방헌법은 결코 채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각 주 헌법안의 경합

1787년 5월 29일부터 6월 19일까지의 시기를 <전원위원회 Committee of the Whole> 시기라 부른다. 이 시기에 4개의 헌법안이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헌법안으로 인구가 많은 주의 이익을 대변한 ‘버지니아 안’과 작은 연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형태인 ‘뉴저지 안’이 있었다. 그밖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찰스 핑크니가 제출한 ‘핑크니 안’과 영국 정부의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작성한 ‘해밀턴 안’이 전원위원회에 각각 제출되었다.


미국 헌법의 골격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버지니아 안은 입법, 사법, 행정의 3부(府)로 이뤄진 정부형태를 제안했다. 이 안에 따르면 상원과 하원 모두 인구비례로 구성되고, 의회는 입법권뿐 아니라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판사를 포함한 공직 임명권을 가지며 행정수반까지도 선출한다.


이에 맞선 뉴저지 안은 새로운 형태의 헌법안을 제시했다기보다는 연합규약을 수정한 수준이었다. 의회는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를 채택하고, 주별 동등 대표 원칙에 따라 한 표씩 부여하는 체제를 제안했다.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다수의 최고행정관을 두되, 모두 의회에서 선출되며 최고행정관 과반수의 요구에 따라 의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제와 관련한 핵심적 내용은 핑크니 안에 담겼다. 핑크니 안은 7년 임기의 대통령을 상·하원 합동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담고 있었다. 대통령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고, 공직 임명권과 군 통수권을 행사하며,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어 지금의 미국 대통령 권한과 상당히 흡사하다.


해밀턴 안은 종신 임기의 대통령과 상원의원을 담았다.

주지사는 국민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선출하고, 3년 임기의 하원만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했다. 해밀턴 안은 전원위원회가 끝날 무렵인 6월 18일에서야 제출된 데다 영국의 정치구조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회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6월 20일부터 7월 26일까지는 전원위원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이 벌어졌고 연방의회 구성에 관한 중요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상원은 기존처럼 주별로 동등하게 2명의 대표를 직접선거로 구성하되, 하원은 인구 비례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7월 26일부터 8월 6일까지는 <세부항목위원회 Committee of Detail>를 구성하여 행정수반을 ‘대통령 president’으로 명칭을 정하고, 대통령에게 행정권을 독립적으로 부여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조문별로 심사를 하는 ‘축조심사’를 통해서 대통령을 의회도, 국민의 직접 선거도 아닌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하면서 4년의 임기와 대통령의 자격까지 결정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첫 헌법제정회의를 개최한 지 116일 만인 9월 17일에 각 주의 대표는 미국 최초의 헌법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  캐서린 보웬이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캐서린 보웬의 책으로 1966년에 출간됐다.(Amazon.com)


필라델피아의 기적

55명의 대표자는 헌법제정회의 내내 대립하고 분열했다. 각 주의 대표단 55명이 헌법 제정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합의된 헌법안에 대해 대표단 55명 중 39명만이 헌법안에 서명했을 뿐이다.  

                                           

전체 13개 주 중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9개 주가 비준을 해야만 헌법으로서 효력이 발효될 수 있었는데, 1878년 12월 7일 델라웨어를 시작으로, 9번째인 뉴햄프셔(1788년 6월 21일)가 비준을 하기까지 10개월이나 걸렸다. 헌법제정회의에 불참했던 로드아일랜드는 1790년 5월 29일 마지막으로 헌법안을 비준함으로써 비로소 미국을 떠받치는 ‘13개의 기둥’이 완성될 수 있었다.


새로운 헌법의 세부 조항에 대해 55명 대표자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개별주의 권리를 제한하는 강력한 정부를 지지하는 대표자도 있었지만, 주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 정부를 주장하는 대표자도 있었다. 일부 대표자는 “미국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라는 구실로 어떠한 종류의 직접선거도 반대했다. 게다가 규모가 작은 주에서 온 대표자들은 연방의회  구성에서 동등한 대표권을 요구했고, 상대적으로 큰 주의 대표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더 많은 대표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예제가 불법인 주의 대표자들은 노예제의 불법화를 희망했고, 노예제가 유지되는 주의 대표자들은 당연히 그러한 시도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다. 더욱이 55명은 같은 주 출신이더라도 상인과 농장주, 친 영국파와 독립파, 왕당파와 공화정파 등 각각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었다.


캐서린 보웬(Catherine D. Bowen, 1966)은 연합규약 아래의 중앙정부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앙정부는 깨져가고 있었고, 이미 깨져있었다. 중앙정부는 선의에만 의지할 뿐, 세금을 징수할 수도, 국가를 방어할 수도, 공채를 상환할 수도, 무역이나 상업을 진흥시킬 수도 없었다."


위기는 단합의 묘약일 때가 있다.

자칫하다간 13개 주로 구성된 불완전하고 느슨한 상태의 연합체마저도 깨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55명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조국의 운명이 55명의 손에 달려있 소명의식은 고비고비마다 ‘타협의 정신’으로 발현되었다.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 그리고 출신 주의 이해관계가 너무도 달랐던 55명의 헌법 입안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던 것에 대해 ‘필라델피아의 기적’으로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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