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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호퍼 Mar 11. 2021

독립, 새로운 국가의 탄생

미국 정치의 양대 기둥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원칙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1492년 북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1607년 무역회사가 보낸 영국인들이 버지니아에 최초의 마을인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1700년대에 이르러선 13개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차례로 건설되었고, 인구, 경제, 문화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독립의 기운이 점차 싹트다.

영국과 미국이 대결 국면으로 치달은 것은 '제임스타운 Jamestown'에 최초로 정착한 지 150년이 지난 1763년 경부터다. 7년 전쟁과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막을 내리자, 영국은 캐나다와 미시시피 주 동쪽의 북미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윽고 영국은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국왕 포고문을 통해 새로운 정책들을 실시했다. 말이 정책이지, 아메리카 식민지 이주민들의 생활방식에 엄청난 제약과 부담을 지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설탕법≫(1764년)은 커피, 비단, 포도주 등의 사치품에 세금을 부과하고 럼주의 수입을 불법화했다. ≪화폐법≫(1764년)은 식민지에서의 지폐 인쇄를 금지했고, ≪숙영법≫(1765년)은 식민지로 하여금 영국 군대에 식량과 주거를 제공하도록 강제했다. ≪인지세법≫(1765년)은 일체의 법적 문서, 신문, 면허증 및 임대차 계약서에 대해 영국 정부의 인지를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반면, 당시의 미국 식민지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나름의 문화적 역량과 풍부한 자치 경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호랑이 새끼가 자라고 있던 셈이다. 그런데, 느닷없는 영국의 중앙집권 정책과 이로 인한 각종 제약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호랑이 새끼의 우리 크기와 먹이 양대폭 줄여버리는 격이었다. 그동안 본토로부터 상당한 독립을 누리고 있던 식민지 이주자들의 자치권에 큰 타격을 가져온 것이다.


당연히,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가 부과한 설탕 법, 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및 ≪강압법Coercive Act≫ 등에 반대했다. 특히, ≪인지세법≫이 가장 큰 규모의 조직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765년 10월, 9개의 식민지에서 온 27명의 대표자는 뉴욕에 모여 자신들이 선출한 식민지 의회에서 부과하는 세금만 부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실력 행사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에 강경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남기를 원하는 온건파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와중에 독립의 불씨를 확산시키기 위해 활약한 두 명의 사상가가 있었다. 매사추세츠의 새뮤얼 애덤스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민주주의적 본능에 호소하는 신문기사를 연일 작성하고 연설을 하며 독립의 정신을 고취했다. 존 애덤스는 식민지 전체를 아우르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모종의 혁명적인 운동의 발판으로 삼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형성된 혁명적인 분위기는 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973년에 발행한 우표. 인디언으로 분장해 차를 바다에 버리고 있다.

1773년 12월 16일 영국의 차(Tea) 무역 규제 조례에 분노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이던 영국 선박 세 척에 잠입해 차가 실린 342개의 상자를 바다에 내던져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분노한 영국은 이듬해인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영국의 직접 통치로 식민지 정책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강경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일련의 조치들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식민지 한 곳을 고립시키기는커녕 다른 식민지들의 연합을 초래한 것이다.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여론은 식민지인들 사이에서도 좋지 않았다. 재산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국 정부가  사건에 대해 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했다면 미국의 역사는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정반대의 대응을 했다.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폭도'로 규정했고, 보스턴 시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왕 조지 3세는 일련의 강경 조치를 관철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지시했다. 게다가, 영국 의회는 보스턴을 봉쇄하고 식민지인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은 '참을 수 없는 법안들'이라 불리며 영국 정부와 13개 식민지를 심각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었다.


영국과 13개 식민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것이다.

결국, 1775년 4월 19일 영국 군대와 식민지 무장세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로도 소규모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다.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식민지 대표들은 서둘러 필라델피아에 모였고, 여기서 민병대를 결집해 대륙 군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출신으로 영국군에 입대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강경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국왕 조지 3세로 하여금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금지하도록 촉구하는 평화 결의안도 채택했다. 그러나 조지 3세는 1775년 8월 23일 식민지들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 존 트럼벌이 1776년 6월 28일,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1826년부터 의회의사당에 걸려 있다. 

식민지 내에서 독립의 목소리와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급진적인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미국의 독립 주장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10만 부가 팔린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소책자에서 세습 군주제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식민지 주민에게 물었다. “전제적인 국왕과 낡은 정치제도 하에 계속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공화국으로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것인가!” 마침내 1776년 7월 4일, ≪제2차 대륙의회≫는 독립선언서를 채택하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하지만 독립선언만으로 미국인들이 곧바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대륙 군대는 영국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영국군에게 필라델피아를 점령당하고 대륙의회 지도부가 겨우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조지 워싱턴의 분투도 있었지만, 1778년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마침내, 매사추세츠 렉싱턴에서 시작된 독립전쟁은 1783년 4월 15일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기까지 대륙 도처에서 8년간이나 지속됐고, <파리조약>을 통해 13개 식민지는 독립과 자유, 그리고 주권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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