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고 나만 울었나?
<완다비전>은 총 9편인데 처음 절반 이상은 완다와 비전이 미국의 어떤 마을에 신혼부부로 이사오면서 시작되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시트콤이다. 뭘 모르고 틀었다면 절대 히어로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유쾌하고 아슬아슬하고 가볍고 즐거운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웃긴 장면마다 인위적인 군중의 웃음소리 효과도 들린다. 그리고 매 에피소드마다 자연스럽게(?) 배경 설정이 10년씩 건너 뛰어서, 50년대부터 00년대까지 각 시대를 보여주는 의상 스타일과 집안 인테리어를 보는 재미까지 있다.
그런데 사실 어벤져스 시리즈의 현재 시점에서 완다의 남편 비전은 죽어서 세상에 없다. 완다는 어렸을적 소코비아 전쟁으로 부모님이 죽고, 성인이 되서는 오빠가 전투에서 죽고, 평생 단짝으로 살아갈줄 알았던 남편 비전도 결국 눈앞에서 마인드스톤이 뽑혀서 죽는다. 비전은 로봇이라서 몸은 남아있지만 그냥 고장난 컴퓨터 덩어리일 뿐. 슬픔에 잠겨있던 완다는 허망하게 차를 몰고 뉴저지의 듣보잡 마을 웨스트뷰로 향한다. 한적한 주택 단지 안에있는 빈 집터. 아무것도 없고 기초공사만 되어있는 흙바닥 가운데로 우울하게 완다가 걸어간다. 손에는 집터를 표시한 지도가 들려있고, 비전이 하트 표시와 함께 남긴 메시지가 적혀있다.
‘같이 여생을 보낼 곳’
그런데 비전은 이제 곁에 없다. 지도를 붙잡고 외로움과 공허함에 사무치던 완다의 고통이 갑자기 붉은 에너지로 폭발한다.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일으킨 물결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붉은 파장이 퍼져나간다. 공터에 순식간에 예쁜 전원주택이 지어지고, 마을 전체가 완다가 어릴적 부모님과 보던 흑백 시트콤에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마을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완다의 곁에 비전이 재창조 된다. 가디건에 면바지를 입은, 건강하고 말끔한 새신랑의 모습으로. 완다 자신도 그에 맞춰서 50년대 스타일로 곱게 말은 금발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새댁이 되어서, 그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우-와, 난 여기서 눈물이 터졌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또 울 것 같다. 근데 정작 나랑 같이 완다비전을 보던 나의 남푠은 액션장면이 별로 없어서인지 보는 내내 졸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하나도 못봐서, 갑자기 내가 눈알이 씨뻘게져서 울고있으니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미안해! 다음엔 화장실 안 갈게!”
“그게 아니잖아!! 우엥!!”
이건 히어로물이 아니라 러브스토리다. 드림웍스 에니메이션 <UP>의 초반 3분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동으로 그냥 눈물이 나온다. 몇 번을 봐도 이건 울 수 밖에 없다. 저번에는 시끄러운 비행기에서 쪼끄만 화면으로 보는데도 울었다. 이제 <완다비전>의 저 장면도 언제든 다시 보면 눈물 수도꼭지가 열려버리는 장면 랭킹에 올랐다.
사실 완다랑 비전은 마블에서 크게 비중있는 캐릭터들이 아니었다. 분량도 많지 않았고. 근데 그 둘이 주연으로 나오는 티비시리즈가 나온다길래 그저 "호오-" 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명치에 맞을 줄이야. 결국 사랑의 힘이다. 해리포터도 결국은 (릴리를 향한 스네이프의, 그리고 아들 해리를 향한 릴리의) 사랑의 힘이 킹왕짱이라는 결론으로 끝나듯이.
만약 내가 저런 상황이고 저런 능력이 있었다면 몇번이든 되살려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동감할 것이다. 그래서 죽어버린 사랑하는 존재를 다시 만나려는, 되살려내려는 이야기는 많다. <인셉션>에서 죽은 아내와 만나기 위해 계속 심연의 꿈속으로 내려가는 레오. <프랑켄위니>에서 죽은 반려견을 살려내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나오는 죽은 이를 불러내는 조약돌. 그만큼 자주 일어나는 간절한 일이라는게 아닐까. 뭐 심지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육신을 잘 보관해두면 영혼이 돌아와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있을때 잘 해야된다. 난 마녀도 아니고 죽음의 성물 조약돌도 없고 그냥 평범한 인간인지라. 우리가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인식하면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