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원래 느린 동물이야
뉴질랜드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단지 한국에 겨울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친구와 어디든 따뜻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단순했나 싶은데, 북반구가 추우니까 남반구로 가면 따뜻하지 않겠어? 싶어서 뉴질랜드로 갔다. 호주는 이미 친구가 한 번 다녀온 곳이라 그냥 제외했다.
여행의 시작만큼이나 여행 준비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뉴질랜드 11월 날씨가 온화하고 봄과 초여름 사이라는 말이 있기에 정말 한국에서 봄에 입던 옷을 챙겼다. 가장 두꺼운 옷이 아디다스 져지였고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생각에 예쁜 블라우스와 원피스를 잔뜩 챙겼다. 분명 랜선을 통해서 본 뉴질랜드는 화사한 봄날씨였는데… 결국 우리는 유난히 볕이 좋았던 며칠 빼고는 가져온 옷을 전부 껴입을 수 밖에 없었다.
뉴질랜드의 11월은 여름이 시작되는 날씨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아낀다면, 눈을 똑바로 보고 꼭 말해줘야 한다. 11월은 아직 춥대요. 진짜로.
하여간 뉴질랜드 여행을 떠올리면 덜덜 떨고 다닌 기억을 뺄 수 없어서 날씨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그곳엔 날씨보다 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멋진 풍경. 풍경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데 나의 빈약한 어휘로 더 멋드러지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거 진짜 윈도우 켜면 나오는 배경화면이다!’ 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했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은 낮고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소와 양들이었다. 차를 타고 도시를 사이를 오갈 때는 사람보다 길 가에 있는 소와 양을 더 자주 만났다.
소들은 아주 멀리 있을 땐 초록색 배경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점처럼 보이다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움직이지 않는 소처럼 보였다. 이 무슨 어색한 말이냐 하면 점차 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잘 보이겠지 하고 다가갔는데 소들이 너무 느리게 행동해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주변에 다니는 차가 없어 갓길에 잠시 차를 대고 한 무리의 소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몇몇 소들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소의 무리 전체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어떤 식의 경험이라고 설명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평생에 다시 겪기 어려운 일일듯 해서 그러고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소들보다는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한참 유행하던 말이 있다. ‘헬조선’. 신조어들이 모두 그렇듯 시간이 지나 지금은 당시의 자극적이고 톡쏘는 느낌은 덜하다. 한창 이 단어가 쓰일 때는 현실에 대한 비관과 자조적인 유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이것만한 게 없었다. 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과 농장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왠만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보다 뉴질랜드 소나 양으로 태어나는 게 낫겠는데? 친구는 그래도 쟤네는 고기되잖아라며 웃고 말았다.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친구 옆에서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며 이번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는 동안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나는 자주 이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나는 굉장히 오래 준비한 시험을 막 끝낸 상황이었다.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낙방으로 인한 인생에 대한 비관은 아니었다. 그 고민은 나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 한 세대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며 느껴온 것들이 엉키고 섥혀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아온 우리는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는 일이 만연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냥 이 시대의 과제라서, 20대라서, 인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아서, 빈부격차가 심해져서,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겠지만 막상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눕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관심은 오직 내일이 오늘보다는 좀 더 나을 것인가, 그것 뿐이다. 막상 취준생이 취직을 하거나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서 순간 인생이 달콤해지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라는 신이 눈 감고 대충 만든 것 같은 또 다른 구성의 퀘스트에 던져지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천천히 움직이는 소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종류의 생각은 아니었다. 다소 순응적이면서도 단순했는데, 그저 소가 소 답게 살고 있는 것 처럼 우리도 조금 더 나 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뉴질랜드의 초원 위에서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그 소들은 숨을 쉬는 동안 만큼은 제 본성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경험이 평생을 경쟁하고 노력하며 사느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져버린 나를 두 눈으로 똑똑히 응시하게 했다. 일을 하다가 가끔 쉴 수 있는 날들이 생겨도 무엇을 하면서 쉬어야 할 지 모르는 나를 보았고, 하나의 목표가 끝나면 다음 목표가 생길 때까지 초조해하며 기다리는 나를 보았다. 솔직히 다음 생 같은건 없다고 믿기도 하고, 다음 생이 있더라도 진짜 소로 태어나고 싶다는 건 아니다. 다만, 참 고고하고 의미 있는 척 하는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니 별 거 없는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문득 문득 그 날의 날씨, 느릿했던 소들, 새파랬던 풀들, 친구와의 시덥잖은 대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