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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Jun 17. 2024

딸이었던 엄마와 딸의 시간

“아이스아메리카노 2잔 주세요”

주문하는 나의 목소리가 살짝 설렌다.

평소와 다르게 집 앞 아지트 카페에 오늘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주 목요일에는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들고 혼자 카페를 찾는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 오늘은 나도 카페 가서 책 좀 읽을까?"

어제저녁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벌써 현관문 앞에 있다며 딸이 하는 말이다.

     



책을 읽겠다는 반가운 의지보다  자발적으로 엄마의 시간과 동참하려는 딸의 정겨움 때문에 더 심쿵했다.

열린 방문사이로 보이는 딸의 공간과 시간에 늘 곁눈질로 지나치는 게 익숙한 나였다.

워킹맘으로 살던 지난 30여 년간 길들여진 보이지 않는 서툰 시간의 벽이 아닐까 생각했다.

직설화법의 엄마를 가끔 빨간펜으로 수정해 주곤 하는 아빠 닮은 사랑스러운 딸이 내 앞에 앉아있다.



     

요즘 TV에 방영 중인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일요예능프로를 우연히 시청했었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솔직한 매력의 이효리가 27년 만에 엄마와 떠나는 경주여행을 화면밖에서 따라가 봤다.

사랑을 듬뿍 주며 자식을 키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픈 속마음이 엄마입에서 흘러나올 때 가슴이 먹먹했었다.

이제는 어릴 적 엄마의 나이가 된 이효리와 현실적인 엄마와의 대화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은 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내라서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면 언제나 텅 빈 셋방 자물쇠를 고사리손으로 열어야 했다.

엄마의 온기가 있는 일요일 하루가 그렇게 짧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일요일마저도 온갖 집안일로 쉴 틈 없던 엄마를 귀찮도록 졸졸 따라다니며 엄마냄새를 고파했었다.

어린 마음에 결심한 게 있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절대로 아이랑 함께 있는 엄마가 될 거야”

오랜 시간 맞벌이로 소소한 엄마와의 추억을 반납당한 지금의 딸에게 그 결심은 미안했었다.



     

언젠가 유명 강사가 한 말이 마음에 꽂혀서 생각이 많아졌던 순간이 있었다.

원래의 말투를 모국어라고 한다.

모국어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집에서 좋은 모국어를 듣고 자란 사람이 좋은 모국어를 쓴다.

<김창옥강사 명강의>

     

어릴 적 부모님은 생계형으로 힘겹게 살아내시느라 자식들에게 사랑표현이나 흔한 칭찬 한마디가 어려운 분들이셨다.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게 먼저 시야에 들어오셨나 보다.

뿌듯한 성적표를 마주하셔도 인색한 칭찬에 어깨가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내 기준으로 보면 남편을 비롯해서 시댁식구들은 모국어가 좋은 사람들이다.

언젠가 막내시누이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아가씨들을 보면 같은 말도 예쁘게 하더라고요.

모국어가 예쁜 사람들 같아요.

제가 부족한 부분이라 많이 부럽고 그래요 "

     



명예퇴직 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노크하며 살고 있다.

아이들에게 잔소리하는 엄마, 딱따구리라는 남편이 붙여준 별명처럼 의미 없는 모국어가 되지 않도록 노력 중이다.

대화의 온도가 낮은 딸이었던 엄마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부족한 마음의 온도를 데워가고 있는 중이다.

따뜻한 언어가 딸에게 좋은 모국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딸 덕분에 커피맛도, 노트북에 담는 글도 왠지 특별하게 느껴진다.

명예퇴직 후의 시간은 어릴 적 나의 결심을 늦게나마 실천하는 딸과의 시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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