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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
17화
동네카페 참견 시점
by
초록맘
Dec 23. 2024
발밑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는 소리가 차가운 느낌이었다.
새벽에 내린 눈이 살얼음으로 변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얇고 뾰족한 마찰음이 났다.
혼자 걷는 공원 둘레길엔 새소리도 얼어버렸고 내 발자국 소리만 또렷하게 깨어있었다.
책 한 권이 담긴 작은 가방을 메고 공원 둘레길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었다.
보도블록이 깔린 공원 바깥쪽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아직도 여전한? A카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는 그저 그런 2층에 위치한
A카페
는 생각보다 오래 존재한다고 감히 판단하고 있었다.
쉽게 눈에 밟히는 카페들 사이에서
A카페
는 그다지 특별한 매력도 손님의 왕래도 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지나치려다 무언가에 끌리듯 멈추고 처음으로 카페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손님도 별로 없으니 조용히 책 읽기엔 괜찮겠다' 싶은 나만의 기준인 이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데크로 만든 계단을 오르려는데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내려오시는 노부부와 마주쳐서 살짝 어깨를 피해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버튼을 누른 것처럼
“어서 오세요”
라는 주인의 맞이인사가 반갑게 들렸다.
텅 빈 카페는 은은한 디퓨져향이 났고 적당히 아담했으며 월동 중인 화분들이 구석진 실내로 옮겨져 있었다.
창가 쪽으로
배치된 빈테이블과 의자가 보였고 예상대로 공원뷰가 가득 눈에 들어왔다.
카운터 쪽으로 걸음을 당겨 메뉴판을 빠르게 스캔해 보니 디카페인은 적혀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카페 여주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혹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되나요?”
“어쩌죠? 디카페인은 안 되는데요.. 죄송해요 손님”
나보다 더 아쉬운 표정과 뉘앙스가 카페 여주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동네카페에서는 디카페인 커피 메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쉽게 돌아서려던 순간,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 정오가 되지 않은 오전 시간이었다.
지금 마셔도 수면을 크게 방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한 아메리카노와 스콘을 함께 주문했다.
벽 뒤쪽의 조용한 자리를 찾다가 활짝 열려있는 커다란 귤 상자가 눈에 거슬렸다.
기둥 중간에 뻘쭘하게 열려있는 귤 상자는 절반정도 양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판매용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뒤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데운 스콘과 커피를 가져다 주신 여주인은 직접 귤 하나를 상자에서 꺼내 나에게 주셨다.
그 후 귤상자의 용도는 카페를 수시로 드나드는 단골손님의 태도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었다.
연세 지긋한 할머니께서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시자 마치 가족을 대하듯 반갑게 카페 여주인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많이 추우시지요?”
길이 미끄럽지는 않으셨어요?
“새벽에 눈이 오길래 무척 걱정했었어, 그래도 다닐만하더라고
우리 손녀 갖다 줄 건데 '카페라테' 따뜻한 걸로 만들어줘 봐요”
어르신의 손녀는 허툰데 돈을 안 쓰는 대신 알뜰히 월급을 저축해서 목돈도 제법 만들었다는 TMI 자랑까지 늘어놓으셨다.
카페 여주인은 손녀분이 대단하다며 기분 좋게 맞장구까지 쳐 주셨다.
주문한 커피를 받으신 어르신은 거리낌 없이 주섬주섬 상자 안의 귤까지 서너 개 챙겨 나가셨다.
아마도 단골손님들을 위한 카페주인의
넉넉한 인심과 나눔의 귤상자
로 보였다.
카페여주인은 어르신을 위해 출입문까지 열어드리며 몇 번씩 조심해서 가시라며 인사를 건네셨다.
나의 눈은 책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열린 귀는 온통 어르신과 카페주인의 대화에 집중되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고 정겹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손님들 중에는 포장해 가시는 연세 지긋하신 단골 어르신분들이 많았다.
처음 카페 계단을 올라올 때 마주친 노부부도 그런 이유였나 보다.
카페 여주인의 진심에서 나오는 공감과 친절한 태도가 손님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방문 리뷰나 블로거들이 추천하는 멋진 뷰와 독특한 인테리어를 검색의 기준으로 삼던 나를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열어둔 귤 상자와 어르신을 위해 출입문을 잡아주는
진심이 끌림이었다.
오늘 나는 동네카페에 대한 서툴고 위험한 참견을 기어코 지우개로 지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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