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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엄마의 어느 눈 내린 아침
by
초록맘
Dec 2. 2024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벚나무가 무거운 눈을 힘겹게 이고 있다.
어제부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폭설
이 내렸다.
오늘
새벽까지 이어진 눈은 다행히 영상 2도로 유지되는 기온 덕분에 서서히 녹고 있는 중이다.
이틀 동안 내린
40cm가 넘는
기록적인
눈폭탄
은
11월
중에는 정말 보기 드문 기상현상이었다.
퇴직 후에도 기상이변으로 인한 폭우나 폭설등의 재해에는 자꾸 남다른 마음이 쓰인다.
때 이른 폭설에 놀랐을 단풍나무가 보이는 주방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 옆으로 몇 걸음 옮기며 수돗물을 틀었다.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한 후였다.
어제 시골 친척분이 택배로 보내주신 김장김치를 남편은 쭉쭉 찢어 삼겹살 수육과 곁들여 맛있게 먹고 나갔다.
아마도 미끄러운 출근길을 버틸 수 있는 근사한 아침밥상을 차려준 것 같아서 내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출근이 없는 아내로서 느끼는 남편에 대한 애틋함을 뒤로하고
빠르게 그릇을 닦고 주방을 정리했다.
닫혀있는 작은 방의
딸아이
는 아직도
침대와 한 몸
일 것으로 예상된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온
‘2000년생이 온다’
라는 책이 떠 올랐다.
우리 집에도
초합리, 초개인, 초자율
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2000년 세대가 한 명 있다.
바로 1년 휴학 중인 2002년생 딸이다.
어젯밤 딸의 서툰 일본어가 문틈 밖으로 들리더니 늦잠을 껴안고 있나 보다.
자기가 꽂혀서 해야겠다 싶은 일엔
열정을 쏟는 딸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오랜만에 거실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줄지어 나오는 홈쇼핑 채널을 넘기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고부갈등 편이라는 프로그램에 멈췄다.
고부갈등 문제는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주제가 되었지만 나름 감정이입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창밖에서
‘쿵 철퍼덕’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추측컨대 쌓인 눈이 녹으면서 우리 아파트 3층 실외기를 부딪치고 화단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분명해 보였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눈’
에 시설물과 낙하물을 주의하라는
아침뉴스
가 떠올랐다.
불규칙적으로 묵직한 낙하소리가 바깥 창문을 통해 자꾸 들려왔다.
TV시청 중에 끼어드는 광고방송이 지루해서 채널을 돌리고
있을 때 드디어 딸의 방문이 열렸다.
간단한 아침인사와 함께 욕실로 향하는 딸의 뒷모습을 느린 시선으로 따라갔다.
휴학하면서 기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등짝의 절반을 덮은 뒷모습이 그림자처럼 내 앞을 지나갔다.
쌀국숫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어가는 딸이 외출준비를 서두른다.
기모 청바지와 후드티에 두툼한 재킷을 입고 나오더니 나에게 묻는다.
"엄마 어떤 가방이 더 어울려요?"
중간크기의 베이지색 숄더백과 손바닥만 한 크로스백을 가리키며 내 대답을 기다린다.
“눈 때문에 미끄러우니까 손이 자유로운 크로스백이 좋겠다.”
“그냥 숄더백 들고 가야겠다.”
도대체 왜 물은 건지...
“참, 딸아! 나갈 때 우산도 챙겨서 나가는 게 좋겠다”
거실창문을 힐끗 보던 딸은 의아하게 묻는다.
“눈도 그쳤는데 왜요?”
“지금 밖에 눈이 녹고 있어서 눈덩이도 떨어지고 나뭇가지에서 물이 많이 떨어질 거야”
“아아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라며 고개를 흔든다.
더 이상 우산 논쟁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럼 나가는 김에 어제 김장김치가 담겨왔던 스티로폼 박스나 들고나가서 재활용장에 버려줘라"
현관문이 닫히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딸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딸이 나간 지 채 1분도 안 돼서
‘예쁜 딸’
로 저장된 발신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뭘 두고 나갔나?”
어리둥절하게 혼잣말을 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응 딸아”
키득키득 거리며 멈출 줄 모르는 딸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왜, 무슨 일인데?”
“엄마! 엄마! 글쎄요 나무에서 질퍽한 눈덩이가 내 머리 위로 계속 떨어져요”
“지금 스티로폼박스를 머리에 이고 겨우 지나가고 있어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하는 딸의 얘기에 나도 같이 한바탕 웃고 말았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로 머리를 보호하며 긴장감 있게 걸어가는 딸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 빈 웃음이 나왔다.
“
앞으로
엄마말
잘 들을게 ㅋㅋㅋ”
라는
딸의 마지막 말이 여운으로 남는
어느 눈 내린 아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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