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 눈이 떠졌다.
암막커튼 사이의 미세한 밝기에 의존해서 휴대폰 시계를 찾았다.
침침하고 뻑뻑한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숫자를 확인한다.
새벽 2시 30분...
어제도 비슷한 시간에 휴대폰과 눈 맞춤을 했던 기억이 났다.
새벽에 깨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시 잠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면 말이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침대에 누웠지만 다시 잠들기 쉽지 않았다.
베개옆에 널브러진 수면안대의 도움도 소용이 없었다.
요 며칠 불특정한 새벽시간에 잠이 깨는 경험은 외로운 걱정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기억하는 아침기상을 했다.
남편과 아들이 현관문을 열고 나간 집안에는 몽롱한 수면의 후유증만 남은 듯했다.
설거지를 위해 주방 개수대 앞에 서자 목덜미의 땀으로 변한 여름이 자꾸 괴롭힌다.
오십 중반을 넘기면서 나의 갱년기를 껴안은 계절이 반갑지 않았다.
불현듯 수면장애도 갱년기가 불러온 고얀 녀석이 아닐는지 의심이 갔다.
미세한 몸의 소리에 집중하며 그동안 불규칙하고 시들었던 운동 스위치를 눌러주었다.
반바지와 쿨링소재의 티셔츠를 입고 선글라스와 캡모자도 챙겼다.
예민해진 피부 때문에 햇살의 자극을 피할 수 있는 아침이나 저녁산책을 택했다.
근처 효창공원 둘레길이 새롭게 조성되어 걷기 컨디션이 좋아진 이유도 있었다.
효창공원 담장을 따라 걷다가 공원 후문으로 들어섰다.
야자매트가 깔린 산책로를 걷다 보니 새로 정비된 시설물들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특별히 눈에 띈 장소는 황토볼장과 황톳길이었다.
맨발 걷기 열풍이 불면서 용산구에서 맨발 걷기 활성화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예산을 지원받은 결과물이었다.
에어건까지 준비된 세족장이 있어서 안심하고 용기 있게 양말을 벗었다.
우선 작은 황토구슬이 가득한 황토볼장에 발을 담갔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황토 구슬을 만만하게 보고 걸음을 옮겼다간 낭패를 본다.
육중한 몸무게와 황토볼이 만나면 뾰족한 비명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황토볼 둘레 의자에 앉아 살살 발마사지를 하고서 황톳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끗하게 정비된 황톳길은 관리자 한 분이 물뿌리개로 황톳길의 수분을 적정하게 유지해 주고 계셨다.
공공의 편의시설이 빛나는 건 누군가의 숨은 유지관리 노력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였다.
덕분에 무성한 나무숲이 드리워진 곳에 위치한 황톳길은 걷는 내내 쾌적하고 아늑했으며 시원했다.
황톳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무언가를 밟는 듯한 황토족탕이 나타났다.
마치 이불빨래 하듯 반복되는 발동작에 ‘쩍 쩍’ 들리는 촉감 소리가 어린 내면의 아이를 깨워 즐겁게 해 주었다.
건식인 황토볼을 체험하고 황톳길을 걷다가 습식 황토족탕까지 마치고 세족장에 앉았다.
시원하게 붉은 발을 씻고 있는데 연세 지긋한 옆자리 아주머니께서 갖고 계신 클렌징폼을 건네셨다.
“요걸로 깨끗하게 씻어봐요”(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여기 자주 오세요?”
“혈액순환이 안 돼서 고생했는데 이거하고 좋아져서 아침, 저녁으로 댕겨요”(아주머니)
황톳길 맨발 걷기는 알려진 대로 혈액순환, 불면증 개선, 스트레스 해소 등 건강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신발을 신고 문명인으로 살고 있지만 발가락이 좋아할 만한 조건은 아닐 것 같았다.
헬맷이나 글러브를 항상 외출 시 착용한다고 상상하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우리가 잃었거나 놓친 자연치유력이 맨발 걷기에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 변화가 생겼다.
며칠 동안 황톳길 위에서 맨발의 자유를 누렸더니 나의 밤수면은 온전히 깊고 까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