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했던 긴 머리카락이 집안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소파커버에도 카펫 위에도 거실바닥에도 딸의 존재를 알리는 흔적이 보였다.
긴 생머리의 대학생 딸이 6월 말에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긴 거슬림이다.
돌돌이 테이프 클리너를 손에 쥐고 잔소리를 하려다 여름이라 꾹 참았다.
며칠 전엔 딸보다 먼저 도착한 기숙사 짐들이 거실 바닥을 점령했었다.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딸의 기숙사 짐들이 여름손님처럼 부담스러웠다.
며칠은 방치될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어라?' 택배상자 안의 짐들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늦게 철이 든 건지 엄마의 잔소리보다 먼저 정리정돈을 하는 딸이 마냥 신기했다.
나름 추측건대, 달라진 딸의 변화에는 기숙사 룸메이트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3월 기숙사 생활관 배정이 있던 날 한껏 ‘솔’ 톤의 신나 하던 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정수기와 가까운 13층도 맘에 들고 룸메이트인 신입생 후배도 착하고 코드가 맞는다며 좋아했었다.
그런 딸아이가 1학기를 마치며 기숙사 짐을 부치고서 저녁 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지간해서는 불평이나 험담을 하지 않는 딸에게서 처음 듣는 하소연이었다.
함께 지낸 룸메가 착하고 성격은 좋았지만 뜻밖에 허당이고 게을러서 조금 맘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딸의 관점에서 바라본 룸메의 털털한 성격을 몇 가지 요약하면 이랬다.
올빼미형 룸메는 아침마다 알람을 무시하고 자동 끄기만 하는 습관 때문에 지각이 잦았다.
3박 4일 해양실습 견학을 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욕실이며 기숙사 청소가 진짜 엉망진창이었다.
기숙사 짐을 빼던 날 룸메는 커다란 자기 택배상자 하나를 빼놓고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게다가 기숙사 냉장고 속 먹다 남은 음식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기숙사를 빠져나간 것이었다.
참다못한 딸은 결국 후배에게 직접 와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카톡을 보냈다고 한다.
묵혀두었던 답답함을 엄마에게 토로한 딸이 그제야 후련하다며 전화기 너머로 웃었다.
딸의 한숨 섞인 하소연에 같이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속으로는 웃음도 났다.
어쩌면 딸이 후배를 보며 거울치료를 받았겠다 싶었다.
후배의 단점들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딸은 기숙사에서 올라온 짐정리며 방청소까지 엄마의 잔소리가 끼어들 틈을 안 줬다.
털털하고 허당끼 많은 룸메가 본의 아니게 딸을 변화시켜 준 것 같아서 살짝 고맙기까지 했다.
거울치료를 받은 딸이 부산에서 올라오면서 우리 가족은 4인 완전체가 되었다.
뜨거워진 지구의 7~8월 여름 나기를 함께 해야 하는 집안의 체감온도가 벌써 걱정이다.
에어컨과 선풍기에만 의존하기엔 역부족 같아서 쇼핑 플랫폼을 켰다.
거실 소파와 자주 한 몸이 되는 남편을 위해 쿨링 냉감섬유의 소파패드를 검색했다.
우유에 말아 즐겨 먹는 냉동 팥빙수도 다량 구매버튼을 눌렀다.
시원한 묵밥을 만들 때 필요한 동치미 냉면육수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냉묵밥은 콩나물 냉국과 더불어 우리 집 여름 인기 메뉴로 직접 묵을 쑤어 만든다.
종이컵으로 도토리 묵가루와 생수를 1:5의 비율로 잘 섞어 냄비에 붓는다.
소금 한 꼬집과 들기름(또는 올리브유)을 조금 넣어준다.
센 불에서 나무주걱으로 같은 방향으로 계속 저어준다.(쉬지 않고 저어준다)
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3분 정도 더 저어서 유리용기에 붓고 식혀주면 완성이다.
탱글탱글 완성된 수제 도토리묵을 얇고 길쭉하게 자른 뒤 채 썬 오이와 양파도 준비한다.(A)
A에 시원한 냉면육수를 붓고 깨소금과 김가루를 넣어주면 여름을 시원하게 삼킬 냉묵밥이 된다.
요즘 같은 무더위는 무작정 소극적으로 견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슬기로운 생필품과의 협업으로 온도를 낮추거나 건강한 여름식탁으로 면역을 높이면 좋겠다.
더불어 가족끼리 화를 부르는 잔소리와 간섭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도 심리적 더위 예방법이겠다.
늘어난 빨래와 집밥 준비로 분주해질 완전체 우리 가족의 여름 나기가 슬기롭고 무탈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