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소는 백범기념관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17번 마을버스의 익숙한 안내방송이 나오자 좌석에서 일어나 버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백범기념관을 가려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소 이름일 뿐이다.
광복절을 며칠 앞둔 탓인지 항상 듣던 정류소 이름이 오늘따라 또박또박 귀에 박혔다.
왠지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접고 몇 걸음 아래의 백범기념관 정문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 근처 백범기념관은 이사 오던 첫 해, 역사교육을 핑계로 아이들과 한 번 관람한 게 전부였다.
삼의사의 묘와 백범 김구선생 묘 등이 있는 효창공원도 나란히 익숙한 장소다.
용산에서 초중고를 보낸 딸아이는 학교 백일장이나 사생대회 장소로 더 많이 기억한다.
바로 집 앞이 사생대회 장소인데 굳이 학교 앞으로 가서 모였다가 되돌아오는 게 억울했다며 지금도 얘기한다.
내일은 8월 15일 광복절 국경일이다.
남편은 항상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집 밖을 나서는 걸 좋아한다.
며칠 전 딸아이가 국중박(국립중앙박물관)을 가보자고 했던 말을 남편은 기억했다.
기회를 포착한 남편이 도시락을 준비해서 용산가족공원에서 먹고 국중박을 가자며 은근슬쩍 제안했다.
말복도 지났고 더위도 한 풀 꺾인 것 같아서 그만 솔깃했다.
최근 tvN의 유퀴즈온 더블록에 국중박의 상품기획팀 관계자가 출연한 적도 있었다.
인기 굿즈와 놀라운 흥행 스토리를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관심이 커진 이유도 있었다.
먼 교외도 아니고 가까운 용산구 관내라서 딸과 함께 가볍게 수락했다.
다음날 용산가족공원과 국중박 나들이를 위해 소박하게 도시락을 챙겼다.
뜨끈한 밥을 작은 스테인리스 통에 소분해서 뚜껑을 열고 미리 식혀 두었다.
마트에서 사 온 양념 LA갈비는 노릇노릇 구워서 뼈를 발라 가위로 먹기 좋게 잘랐다.
적당히 익은 열무얼갈이김치와 포기김치도 랩을 덮어 안전하게 반찬통에 담았다.
깻잎과 쌈장도 챙겼고 천도복숭아와 샤인머스켓도 디저트로 준비를 마쳤다.
오전 알바를 마친 딸아이까지 중간에 픽업하면서 모든 계획이 순조로워 보였다.
용산역 앞에서 좌회전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국중박 주차장 입구가 있는 반대편 차로를 보는 순간 느낌이 쎄 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들이 끝도 없었다.
좁은 용산가족공원 주차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이미 최고의 핫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차량과 인파에 끼어들 엄두가 나질 않아서 남편은 운전대의 방향을 다시 집 쪽으로 틀었다.
“아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리 그냥 효창공원에서 도시락 먹는 게 어때요?”
늦은 점심으로 허기진 우리는 별다른 반대 없이 결국 딸의 플랜 B에 동의했다.
잠시 후, 익숙하고 낯익은 효창공원 부근에 도착했고 남편은 차량 시동을 껐다.
도시락 배낭을 멘 남편과 우리는 대한노인회 건물이 보이는 효창공원 안으로 걸어갔다.
이웃한 효창운동장의 키 큰 하얀 조명탑이 담장 너머에서 궁금한 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범기념관 맞은편에 위치한 ‘의열사’ 앞도 지나쳤다.
원래 7위 선열(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을 모신 곳인데 현재는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8위 선열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작은 연못의 파란 기둥 조형물 옆으로는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의 묘’가 있다.
조금 더 중앙으로 들어가면 소나무에 둘러싸인 김구선생의 묘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와 연결된 중앙 공터에는 울창한 나무와 테이블 의자가 쉼터처럼 조성되어 있다.
어쩌다 플랜 B 덕분에 독립운동가의 기운을 가득 품은 곳에서 소박하고 맛있는 도시락가방을 풀었다.
적당한 구름조각, 나무그늘에 쪼개진 햇살과 바람. 쉼표 없는 매미소리, 우리 식탁에 관심을 보이는 비둘기 몇 마리까지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어주었다.
학교에서 배운 뻔한 표현 같지만 뭔가 묵직한 마음속 느낌표도 숨길 수가 없었다.
"독립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플랜 A가 아니어도 괜찮았던 오늘은 제80주년 광복절이다.
남산공원(백범김구선생, 안중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