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입김과 함께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정류장 앞 불 켜진 카페에는 눈오리 다섯 마리가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내린 첫눈 덕분에 카페주인 손에서 갓 태어난 오리들 같았다.
귀여운 눈오리보다 얼어버린 길바닥과 더딘 버스의 도착이 겨울바람에 더 야속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마을버스가 멈춰 서자 깊숙이 묻어둔 손과 휴대폰이 승차 리더기 가까이로 갔다.
‘삑’하고 울리는 소리가 내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하는 출발 여정의 신호음처럼 들렸다.
그렇게 출발한 마을버스에서 지하철 환승을 했고 곧이어 용산역에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멀리 ITX를 타고 오는 친구를 생각해서 정한 집결 장소였다.
갑작스러운 영하의 날씨와 미끄러운 도로였지만 반가운 우정의 온기는 훈훈하기만 했다.
게다가 횡단보도 신호등과 기다리던 400번 버스 등 모든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함께 하는 동안 기분 좋은 행운까지 우리 셋을 따라다녔다.
“다음 정류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앞입니다”
목적지 안내방송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정류장에 발을 디뎠다.
하얀 눈에 덮인 국립중앙박물관의 모습은 언뜻 멀리서 봐도 웅장해 보였다.
박물관 쪽으로 하얀 눈을 치운 일직선 길은 카펫처럼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미끄러운 영하의 날씨와 평일 오전 탓인지 박물관 입구는 예상보다 한산했다.
내부 입장을 앞두고 배낭이나 백가방은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간식은 1층 물품보관함을 이용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문득 스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입장할 때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던 기억도 났다.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관람객 안전을 위한 꼭 필요한 운영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보안검색대를 지나 중앙 통로를 걷다 보면 천정에 닿을듯한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올려다보게 된다.
13.5m라는 압도적인 높이의 탑과 멋진 구도로 휴대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2층 ‘사유의 방’과 3층 ‘달항아리’ 전시실을 찾는 게 먼저였다.
반가사유상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리며 단숨에 2층 대리석 계단을 운동삼아 올랐다.
‘사유의 방’ 표지를 발견한 뒤 입구에 적힌 아래의 짧은 글귀를 읽고 나니 묵직한 기대감까지 올라왔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Time to lose yourself deep in wandering thought)
전시실 내부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만 나란히 전시된 전용 공간이었다.
어둡고 고요한 내부로 들어서자 생전 처음 보는 작품전시 형태와 맑고 청아한 음향에 절로 숙연함이 느껴졌다.
정밀한 조명은 그림자조차 없이 반가사유상 전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도록 몰입감을 주었다.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과 벽, 수천 개의 압정을 박아 놓은 듯한 반짝이는 천정의 신비감은 강렬했다.
유리보호막도 없는 타원형 전시대를 빙 돌며 반가사유상이 가진 단아한 입체감을 두 눈 깊이 담았다.
말도 안 되는 정교하고 우아한 역사적 유물과 같은 습도와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는 자체가 전율이었다.
조금은 소란스럽게 입장하던 남학생들조차도 공간이 주는 고요함에 압도되는 듯 보였다.
양복 입은 안전요원 아저씨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조용해지는 눈치였다.
‘사유의 방’에서 왜 사람들이 여유와 힐링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유의 방'을 나오자 ‘기증관’이 있는 곳으로 동선이 이어졌다.
기증관 진열장의 유리는 지나치게 선명하고 투명해서 유물관람이 놀랍도록 생생했다.
몇 번씩 눈을 크게 뜨고 관찰하면서 진짜 유리가 있는 게 맞나 의심할 정도였다.
조용한 음악과 소파와 전통 문양의 테이블도 있어서 잠깐의 편안한 쉼도 즐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박물관 곳곳에 마련된 안락한 휴식공간은 걷는 피로감을 훨씬 덜어주었다.
우리는 사유의 방에서 느낀 고요한 감동을 음미하며 3층 분청사기 백자실로 입장했다.
청자와 상감기법 등 다양한 도예기법에 감탄하며 전시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마침내 하얀 공간에 놓인 '백자 달항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달항아리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리는 달빛 미디어 영상도 함께였다.
마치 한옥방에 놓인 달항아리와 창문을 연상케 하는 달빛 영상과의 조화는 무심한 듯 빨려들게 했다.
그동안 가져왔던 박물관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단언컨대 복잡하고 지치고 힘든 순간에 이 기억의 잔상들은 마음 자산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유의 방’이 주는 깊은 고요와 ‘달항아리’의 둥근 여백을 마음지갑에 가득 채우고 국중박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