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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May 27. 2024

퇴직자와 안식휴가자의   아름다운 콜라보

오늘부터 1일이다.

2023년 명예퇴직의 시간이 시작되면서  나의 시선은 새로운 렌즈로 장착된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하루를 늦잠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설렘이 아침 일찍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퇴직 후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평일 대낮이 주는 낯선 풍경 앞에 서는 고즈넉함이었다.



언제나 아파트를 나서는 나의 오감은 자비롭게 열렸다.

흔히 볼 수 있는 경비아저씨의 작업모습조차도 반가운 볼거리처럼 느껴졌다.

나무사이 어딘가에서 들리는 새소리에도 왠지 대답을 해 줘야만 할 것처럼 친절해졌다.

 

바깥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착한 시선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큰길을 걸으면 “아, 이런 모습이었구나. 여기가” 조용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출퇴근길에 정해진 시간, 정해진 목적지로 차를 몰며 오갔던 똑같은 장소였지만 다르게 보였다.

이동수단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집에서부터 손잡고 나온 ‘여유’ 덕분이었다.



나 데리고 사는 혼자의 시간도 충만하다고 느낄 무렵 남편까지 반가운 손을 내밀었다.


“나 이 번 가을에 장기근속 휴가로 두 달간 안식년을 쓸까 해,

공 들였던 프로젝트의 성과가 좋아서 위에서도 흔쾌히 다녀오라네?”



큰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던 나에게 엄마한테 용돈 많이 받은 친구가 내 옆에 다가온 것처럼 횡재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9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다른 듯 같은 휴가 공동체를 경험했다

50대는 아이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중요하고도 홀가분한 선물 같은 자격이 있어서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이다.

봄에 친구와 제주 한 달 살기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 번에는 강원도 일주일 살기를 추진했다.



강원도는 남편에게 친숙하고 각별한 곳이다.

어린 시절 고향이면서 인제에서는 군생활 3년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첫 출발지는 강원도 인제 곰배령이었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저녁 무렵 도착한 숙소는 넓은 잔디마당 가득 야생화를 품은 조용한 한옥펜션이었다.

펜션 운영자의 손끝이 참 부지런하고 감각적이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취향저격 숙소였다.

식자재 마트를 찾아 장을 본 후 숙소에서 고기도 굽고 맥주도 마시며 강원도 입성을 자축했다.



산행이 있는 다음날 아침은 비가 내렸다.

마음처럼 성큼성큼 발걸음이 따라오진 않았지만 청정 강원도에서 듣는 빗소리의 위로가 있었다.

평소와 차원이 다른 산소와 접속한 몸속 세포들도 함께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곰배령은 곰이 하늘로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라고 적힌 정상의 표지석과 자욱한 안갯속에 어우러진 야생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곰배령을 시작으로 설악산 용소폭포, 속초 테디베어팜과 아바이마을, 원대리 자작나무숲길,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담사, 대승폭포로 이어지는 일주일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



부부들은 공감하겠지만 우리도 여행 출발 전에 싸우지 말자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주로 이과와 문과 성향차이에서 일어나는 공감력 부족 현상이 원인이 되때문이었다.

인스타 맛집이나 카페 감성을 남편이 공감해 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접고 시작하는 것도 필요했다.

싸우지 말자는 약속과 더불어 남편에게 다짐받은 말이 하나 있었다.

상대가 공감받고 싶어 하는 말에 자신의 서툰 생각을 주입하지 말고 그냥 “그렇구나” 한 마디만 해 주자는 거였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 한 마디의 위력은 기대이상이었다.

때로는 진심을 가장하기도 하고 영혼 없이 나오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순진한 우리의 뇌를 웃게 해 주기엔 충분했다.

퇴직자와 안식휴가자의 콜라보가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그렇구나" 덕분이었다.


남편은 지금도 ‘그렇구나’를 마법의 단어라고 말하며 실천하고 있다.

내가 째려보는 순간에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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