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난 주말 아침이 봄처럼 포근했다.
지금쯤 남편은 새로 산 러닝화를 신고 집 근처 공원 트랙을 가볍게 뛰고 있을 것이다.
나 혼자 텅 빈 주방에 앉아 아침식단을 고민하다가 몇 가지 그럴싸한 메뉴를 떠올린다.
어릴 적 친정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명절에 남은 전을 활용한 ‘전찌개’가 첫 번째다.
당시 아버지가 만든 전찌개는 음식 잔반처리 느낌으로 비호감이었는데 지금은 아련한 향수처럼 생각이 난다.
전찌개의 주인공들을 김치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녹두전, 육전, 동태전, 산적꼬치전, 동그랑땡 등 재래시장표 모둠전이 알차게 남아있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전은 썰고 대파와 청양고추도 조금 준비한다.
냄비에 묵은 김치를 볶다가 다시마 우린 물에 육수 한 알도 넣었다.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으면 썰어 둔 전들을 예쁘게 담는다.
한 소끔 끓으면 가운데 대파와 청양고추를 올려 고춧가루와 새우젓,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각각의 전 재료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하고 깊은 맛이 거의 밥도둑 수준이다.
두 번째 메뉴는 '도토리묵'이다.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국산 도토리가루를 수납장에서 찾았다.
손잡이가 있는 냄비에 종이컵으로 도토리가루 한 컵과 생수 다섯 컵(1:5)을 넣어 거품기로 잘 섞어준다.
이때 약간의 소금과 들기름도 넣어주면 향긋하다.
실리콘 주걱을 사용해서 약불에서 한 방향으로 눌지 않도록 계속 저어줘야 한다.
도토리묵이 진한 갈색으로 변할 즈음엔 슬슬 팔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주방으로 쓱 들어왔다.
“뭐 만들어?”(남편)
“마침 잘 왔네.. 주걱으로 묵 좀 계속 저어 줘!”(나)
남편이 3분가량 묵직하게 저은 도토리묵은 유리용기에 담아 그대로 식혀주면 완성이다.
아침밥상 준비에 약간의 존재감을 뽐낸 남편은 웬일인지 주방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마늘 꽁지를 정리하던 내 손에서 마늘 하나가 ‘톡’하고 식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남편이 서 있는 위치로 굴러갔는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친절하게 마늘을 주워 주었다.
그런데 식탁아래에서 주운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거 누구 거야! 누가 양말을 여기다...”(잔소리하는 남편)
손에 뭔가를 들고 툴툴대는 남편 쪽을 쳐다본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남편이 들고 있던 건 양말모양의 식탁 의자발 커버였다.
아마도 밀고 당기면서 헐거워진 의자발 커버 하나가 훌러덩 벗겨져 있던 걸 남편은 모르는 눈치였다.
식탁에서 밥만 먹고 일어나는 무신경한 남편의 레이더로는 예상 못한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그 게 맞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엉?”(어리둥절한 남편)
“식탁 의자에서 벗겨진 양말이거든!ㅋㅋㅋ”
".....;;;ㅎ"(민망해진 남편)
머쓱해진 남편은 조용히 쪼그려 앉아서 집 나온 양말을 의자에 신겨주었다.^^
키득키득 웃는 나를 피해서 달아난 남편은 곧장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괜스레 자고 있는 아들과 딸의 방을 오가며 소란을 피웠다.
“얘들아~
어서들 일어나 밥 먹자!
주말에는 다 같이 먹어야지!”
결국 아빠의 성화에 못 이긴 딸만 나무늘보처럼 한 참만에 식탁에 앉았다.
시원한 창가에 올려놓았던 도토리묵이 탱글탱글하게 도마 위에서 엄청난 탄력을 뽐냈다.
달래장에 미나리와 부추를 썰어 묵과 버무렸더니 건강한 봄맛이 되었다.
얼큰한 묵은지 양념을 흡수해서 촉촉해진 모둠전 김치찌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서 침샘을 자극했다.
어린 시절 친정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셨던 ‘전찌개’의 맛을 나도 알아버렸다.
겨울 끝자락에 완성된 아침 밥상은 남편의 전완근과 웃음 에피소드가 함께 거든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