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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록 Sep 24. 2024

시련

깊은 새벽이었다. 아빠는 나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아빠의 따뜻한 체온이 나를감쌌고, 나는 그저 발밑의 보도블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는 이 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 그 길은 나와 아빠의 또 다른 삶을 향한 걸음이었다 그리고 불안함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한 새로운 삶이 행복할 거라고 되뇌이며 행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램은 현실 앞에서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


아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새로운 가족, 계모였다. 나는 그를 이모라고 불렀지만, 그의 존재는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화가 나면 감정은 주저 없이 폭발했고, 그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어쩌면 나 자신이 그 집에서 '부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바람 속에서 담담히 서있기


그러던 어느 날 밤, 집 안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계모는 내가 가지고 있던 엄마의 사진에 눈이 멎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고,그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리모컨, 물병, 손에 잡히는 것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쌌고 뒤로 물러서다 바닥에 넘어졌다.


공기는 차가웠고, 방은 나의 매 맞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소리 없이 울며 그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나의 세상은 무너진 것 같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저 조용히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8살이었다. 견딤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이었다.


절망도 그저 순간일 뿐


그날 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허겁지겁 집을 뛰쳐나왔다. 어딜 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고요했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를 감쌌다. 옆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한번에 죽을 수 있을까?"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고싶지 않았다. 난 그저 내가 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가장자리까지 다가서도, 나는 발을 떼지 못했다.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살아남으면 더 비참해질까 두려웠다.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차가운 바람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지만, 결국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련일테니


계모의 폭력은 그날 이후로 더 빈번해졌다. 나의 삶은 벗어나고 싶음으로 채워졌고, 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의 문은 단단히 닫혀졌고 나는 그 어둠이 점점 나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공포를 떠올리는 지금의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상처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그 시련은 슬퍼도 웃을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삶이란 그랬다. 시련은 피할 수 없었고, 시련의 자리는 내 안에 깊은 파임을 남겼다. 다만 나는 이제 과거의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그 시절의 나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 시절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임을 인정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


삶의 시련은 언제나 예고 없이 다가온다. 아픔은 그 순간에는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선다. 많은 시련을 겪다보면 좋은 점이 있다. 이보다 더한 시련이 아닌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처는 나를 약하게만 만들지 않았다. 진정한 강함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에서 나온다.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랑받지 못한 못난이라 느꼈지만, 이제는 그 상처조차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시련을 견뎌본 자만이 상대의 아픔을 바라보고 연민스런 울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선택한 나만이 있을 뿐이다.


 다듬고 단단해지기


삶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리고 시련은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무너질 때마다 여전히 아프다. 시련은 언제나 우리를 흔들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단단해짐을 선택할 뿐이다. 시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이제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 상처들 덕분에 더 단단해진  또 다른 나를 만난다.


우리는 종종 아픔을 두려워하지만, 아픔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련이 내 앞에 찾아와도, 그때마다 나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시련들은 나를 조금씩 다듬어줄 것이다.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감사히도 더 단단해진 내가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덕분에 나는 더 강해지고, 한층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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