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공의 서거 그리고 나의 P
필립공이 돌아가셨다. 어제오늘 영국 뉴스의 대부분은 필립공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의 서거에 관한 기사로 채워졌다. 영국에 오기 전에도 그랬고, 영국에 와서도 나는 영국 왕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고, 솔직히 말해 출신을 알 수 없는 평민이지 않은가. 그러니 영국 왕실은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잘 알려진 특별한 가족들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그들의 가정사는 연예인 가십거리와 별반 다들 것이 없어 관심 갖지 않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여왕의 남편 이름이 필립이라는 것도 영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이름도 몰랐던 필립공이 누구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고인이 얼마나 특별하고도 특이한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4살일 때 처음 만났던 둘은 필립공의 2차 세계 대전 참전과 양쪽 집안 및 민심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했다고 한다. 그 후로 74년간 100세가 다 될 때까지 그는 여왕의 곁을 지켰다. 잘 모르는 분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니 나도 맘이 조금은 무거워지는 듯했다.
딱 고만큼이었다. 필립공에 대한 나의 애도는 아주 얄팍하고 옅었다. 내 마음이 호수라면 한 5cm 되는 깊이의 슬픈 감정으로 필립공의 일생에 대한 이런저런 기사를 클릭하다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노부부가 되어 팔짱을 끼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필립공과 여왕의 사진은 호수에 던져진 큰 바위처럼 내 마음을 큰 슬픔으로 일렁이게 했다.
함께한 시간이 70년이 넘는단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서로에게 이 세상에 하나뿐인 배우자였다.
한눈에 반했던 싱그럽고 멋진 모습은 더 이상 온 데 간데없지만, 주름지고 앙상한 얼굴에도 미소꽃을 피우게 하는 서로의 정인이었을 것이다. 70년 세월을 함께 해 온 내 정인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곁에는 P가 있다.
70년은 아니지만 2001부터 연인으로 지냈으니 함께한 시간이 20년이 다 되었다. 내 나이 21살에 만나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정성껏 연애를 했으니 P는 나의 첫사랑 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혹독한 장거리 연애를 3년이나 견뎌냈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결혼을 했다. 그 후로 우리는 좋은 날에도, 영광스러운 날에도 함께 있었다.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했던 날도 없지 않았지만, 지치고 힘든 날에는 가까이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함께 버텼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이 이젠 삐쭉삐쭉 새치가 돋아나고 배도 나오는 40대가 되었다. 그래도 P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정인이며,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다. 내 인생에 P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보다 P와 함께 가꿔온 시간이 더 길다. 나는 20년의 세월을 갖고도 이리 애틋해하는데, 70년을 함께한 여왕은 그 세월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칠까...
나는 P가 나의 반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듣는 걸 좋아하네. 어머 우린 운명이야'
'나는 기다리는 거 싫어하는데, 이 사람은 약속 시간을 칼 같이 지키네. 우린 천생연분이야'
'나는 닭다리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닭가슴살을 좋아하네. 우린 너무 잘 맞아'
하나의 검을 쪼개 나누었던 운명의 징표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딱 맞는 반쪽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을는지도 모르겠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P가 더 이상 내 반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반으로 나눌 수 없는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 서로를 제쳐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인생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속 깊은 응어리도 P에게는 다 털어놓았다. 나도 어찌할 줄 몰라하던 나를 P는 따뜻한 위로로 추슬러 주었다. 미국 유학 시절, 스위스에 계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P는 그 후로 오랫동안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이들이 새근새는 잠든 고요한 밤,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울던 P의 눈물은 내가 닦아 주었다. 반쪽과 반쪽으로 만났지만, 20년 세월을 함께하며 P와 나는 서로를 더욱 깊고, 더욱 넓게 감싸 안아주고 있다.
요즘은 우리가 마블 파운드케이크를 닮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초코 반죽과 바닐라 반죽을 반반씩 섞어 포크로 휘휘 저은 후 오븐에서 구워내면 대리석처럼 멋들어진 무늬가 생기는 마블 파운드케이크 말이다. 마블 파운드케이크는 둘 반죽이 적당히 섞여야 맛도 좋고 모양도 예쁘다. 한 가지 반죽이 너무 많아 다른 색 반죽을 압도해 버리면 마블링이 안 예쁘게 나온다. 두 반죽을 하나가 되게 너무 많이 섞어 버리는 것도 안된다. 그러면 초코와 바닐라가 원래의 색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똥색 케이크가 되어 버린다. 둘이 적당히 섞인 케이크 반죽은 인생이라는 뜨거운 오븐 열기를 견뎌야 비로소 맛난 마블 파운드케이크가 된다. 마블 파운드케이크가 완성되면 이젠 초코와 바닐라 부분을 떼어낼 수 없다. 서로를 적당히 휘감아 안고 있는 두 반쪽을 떼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떼어낼 수 있다 하여도 그건 더 이상 마블 파운드케이크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20년을 불같은 오븐에서 구워지면서 맛난 케이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달콤한 부부 인생을 함께 해주는 P가 더 고맙다.
앞으로도 몇 년은 거뜬히 살아 100세, 110세 생일잔치를 할 것 같았던 필립공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으니,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게 사실이구나 싶다. 누구다 다 알고는 있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 말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P의 죽음을 필립공의 별세를 통해 생각해봤다. 불로장생으로 백 년 만년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P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럼 우리의 마블 파운드케이크는 어떻게 되려나... 초코든 바닐라든 사그러 없어져 구멍이 숭숭 나 있을까? 아니면 제 모양을 지탱하지 못해 바스러져 쓰러지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슬픔이 차오른다.
괜히 서글퍼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케이크를 구워볼까 한다. 달콤한 마블 파운드케이크를 따뜻하게 구워내 나의 P와 함께 나눠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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