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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롱 Jun 25. 2021

쿠쿠 밥솥과 나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수고가 많아, 우리.

또 고장이다. 이번에는 스무디를 만든다고 장만했던 블렌더.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망고랑 파인애플에 요구르트 한 스푼 넣고 갈 던 중이었다. 딱딱한 얼음은 넣지도 않았는데, 멀쩡히 잘 돌아가다 말고 갑자기 위잉 위잉.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칼날이 돌길래 무서워서 바로 전원을 껐다. 다시 전원을 눌렀더니 무반응. 건더기가 그득한 망고 파인애플 스무디는 결국 마시지 못하고 스푼으로 떠먹어야만 했다.


영국에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장 나 버린 전자제품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제일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신 물건은 테이블 그릴. 무려 15년 전에 시어머니께서 선물해주신 테이블 그릴은 스위스와 독일을 거쳐 영국에서까지 열심히 일해왔다. 세 국가의 전기 콘센트의 모양이 모두 달라 항상 어댑터를 끼워야 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한국식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싶을 때마다 꺼내 든 나의 애정템.  독일에서는 EU 식 어댑터에 적응하고, 영국에 와서는 또다시 영국식 어댑터에 적응을 해야 하고. 그래서 힘에 부쳤을까? 여느 때와 같이 삼겹살에 목살까지 구워 먹던 날, 뜨거워야 할 그릴이 서서히 식어가더니 결국엔 온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날, 익다 만 고기는 결국 프라이팬에 옮겨 구워야만 했다.


다음엔 헤어 드라이어기.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세탁기, 진공청소기, TV 등 몸집도 크고 가격도 꽤 나가는 가전제품을 사는 와중에 생각 없이 집어 든 헤어드라이어. 이 따위 것 아무려면 어때, 고장 나면 하나 다시 사면 그만이지 싶어서 아무거나 샀다. 보통 크기에다 검은색을 한 평범한 디자인. 이 존재감 없는 아이는 독일에서 6년 동안 성설히 일했고, 영국에 와서도 열심히 우리 네 식구 머리를 말려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막내가 춥다고 벌벌 떨던 추운 겨울 어느 날. 따뜻한 바람을 내불던 헤어드라이어가 '팅-'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남편은 열선이 끊어진 것 같다는데, 아마도이 아이 숨통이 끊어졌을게다.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으니까. 그날, 막내는 결국 머리가 젖은 채로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요즘엔 안 그래도 늙으신 쿠쿠 밥솥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미국에서 독일로 이사 갈 때 친정엄마가 한국에서 공수해 오신 압력 밥솥.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에게 삼시 세끼 필수품이면서, 해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템 아니던가. 거기다 딸내미 준다고 이 크고 무거운 것을 비행기에 이고 지고 온 엄마 생각도 가끔 하게 하는 고마운 효자템. 부엌 천장을 뚫을 기세로 췩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뜨거운 김을 뿜어내던 밥솥이었는데... 요 며칠 사이 기력이 쇠했는지 피익-피익-. 매가리 없는 소리를 몇 번 내다 취사가 완료되었다고 항복해 버린다.  우리 네 식구 먹여 살리느라 독일에서 열심히 일한 쿠쿠. 그런데 영국까지 끌고 와 너무 고생을 시켰나 보다. 미안해 쿠쿠야, 그동안 수고 많았어.


주방 한켠에 있는 쿠쿠 밥솥이 이리 애잔하게 느껴질 줄이야... 한참 바라보니 문득 쿠쿠 밥솥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산 쿠쿠가 독일을 거쳐 영국에 왔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도 어쩌다 보니 스위스, 미국, 독일 거쳐 영국에까지 와 있고... 갑자기 울컥하고 뜨거운 감정이 솟아오른다. 7년을 함께 한 밥솥에게는 고생이 많다며 이리 다정히 대하면서, 사십여 년을 함께한 나 자신에게는 왜 그러지 않았는지.  해외생활의 고군분투? 그건 내가 부족하고 못나 빨리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 여겼다. 그러니 고생 많았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은 커녕 늘 나 자신을 몰아붙이기 일쑤. 빨리 그 나라 말을 익히고, 어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서,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외지인 티를 벗고 현지인처럼 살라고. 특히 영국에 와서 코로나로 일 년의 시간을 잃어버린 후, 조바심에 쫓겨 스스로를 더 궁지로 몰았다.


영국에 온 지가 언제인데 어찌 영국인 친구 한 명 못 사귀었냐고,

왜 아직도 영국 학교 시스템과 입시 정보를 다 파악하지 못했냐고,

그깟 대수롭지 않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왜 어렵지도 않은 말을 못 알아들었냐고,

잠들지 못하는 밤, 혼자 이불속에서 발길질을 할 때마다 나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언어의 장벽이 높은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왔으니 이제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고,

10년의 경력 공백을 어서 채우라고,

인터뷰에서 왜 버벅 거렸고 실무 시험에서는 왜 또 그리 바들바들 떨었냐고,

마음만큼 되지 않을 때마다 어째 뭐 하나 제대로 잘하는 게 없냐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이러지 말자. 내가 쿠쿠 밥솥보다 못한 게 뭔데! 부엌에서 밥만 열심히 하면 되는 쿠쿠보다야 아무러면 내가 더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다정한 위로의 한 마디, 밥솥한테 하는 만큼만이라도 해줘야겠다. 나한테...


또 새로운 곳에 와서 적응하느라 네가 수고가 많아.


조급해하지 말고, 찬찬히 적응하면서 잘 살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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