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언니표 간장 닭조림
아무거나 먹고, 아무렇게나 먹어도 괜찮은 나. 미식가도 악식가도 아닌 그냥 '막입'. 특별히 맛있는 것도 없지만, 딱히 맛없는 음식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감칠맛이 뭔지 모르며, 간을 잘 보지 못하는 덕분에 짠 것, 싱거운 것, 비린 것, 느끼한 것 구분하지 못하고 잘 먹는다. 심지어 살짝 상한 듯 한 우유나 요구르트도 잘 마시고, 또 소화도 잘 해낸다. 그러고 보니 입맛뿐 아니라 오장육부까지도 둔한가 보다.
이런 둔한 미각으로 인해 음식에 대한 큰 애착도 없다. 덕분에 해외에 살면서 입에 안 맞아 못 먹는 음식 없고, 김치 없어도 밥만 잘 먹는다. 간절하게 특정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도 잘 안 들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가도 금세 사라져 버리기 일쑤. 먹고 싶은 음식을 향한 애착 혹은 집착이 있어야 이런저런 요리도 해 먹을 텐데... 유학 생활이 직장 생활로 이어지면서 바쁘다는 핑계까지 더해 음식은 내게 그저 생명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신혼 초 남편과 나는 삶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조리 식품에다 씻어서 자르기만 하면 되는 샐러드를 곁들인 초간단 음식을 주주 장창 먹어댔다. 맛이 있네, 없네, 짜네, 싱겁네 하는 군소리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는 막입은 온갖 산해진미를 만들어내는 금손만큼이나 불편함 없는 해외생활을 하는데 큰 몫을 한다. 음식으로 인한 향수병도 없고, 못 먹어서 생기는 욕구불만도 없고, 어쨌거나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대장금이 아닐 바에야 막입인게 천만다행! 그렇게 자부하던 나의 막입은 아이를 낳고 몇 개월 후,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부터 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 말고도 책임져야 할 입이 셋이나 있으니 어쨌거나 저쨌거나 해내야 했던 요리. 허나 온갖 야채와 고기를 사 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에 조리대 앞에 서면 무섭기까지 했다.
식구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 먹이기 위해 매일 레시피부터 검색. '쉬운', ‘초간단'이란 말이 제목에 콕 박힌 레시피 중, 들어가는 양념 가짓수가 제일 적은 것을 골라 말 그대로 시키는 대로 했다. 레시피 한 줄 보고, 간장 세 숟가락으로 계량하고, 또 한 줄 보고 마늘 반 숟가락 다져 넣고... 그렇게 인터넷 레시피에 기대어 겨우겨우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내 레시피 레이더 망은 항상 ON. 누가 맛있는 음식을 해주면 배워서 세 남자 먹여보겠다고 레시피를 물어봤다.
그렇게 레시피를 적어 모으기를 십여년. 그 레시피 북을 용케 잃어버리지도 않고 짧지 않은 세월 내내 잘 끌고 다니고 있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독일로,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나도 이젠 야채죽을 끓이기 위해 레시피를 뒤지던 초짜에서 벗어나 손님 초대도 무서워하지 않는 조리 경력 십여 년 차 주부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뭐 해 먹지? 주말에는 손님이 오시는데 뭘 대접해야 하나?' 하고 메뉴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이 오래된 레시피북을 꺼내 들춰본다. 백종원 목살 스테이크, 차승원 제육볶음, 이연복 탕수육.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전 국민이 다 아는 스승님들 레시피가 제법 두둑하게 쌓여있다. 몇 장 더 넘기면 반갑고 그리운 이름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세라 갈비찜, 인애 메밀 샐러드, 연하언니 밥전, 호진이 롤케이크, 지수 언니표 간장 닭조림... 아! 냉장고에 닭가슴살 두 덩이가 있으니 오늘 저녁엔 이걸 해 먹어야겠다.
‘지수 언니표 단호박 간장 닭조림'이라고 적힌 레시피를 펼쳐 놓으니, 순식간에 지수 언니와 함께 했던 2013년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로 돌아간 듯하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며 마음 속으로 지수 언니에게 말을 걸어 본다.
'언니, 허벅지 살이 더 좋지만, 닭가슴살도 괜찮지? 그리고 단호박은 없는데 대신 감자 넣으려고.'
'응, 돼 돼. 다 돼. 고기랑 있는 재료 썰어서 볶다가 양념장 넣고 끓이기만 하면 돼. 정말 쉽지? 카레랑 똑같아.'
요리를 무서워하던 내게 쓱쓱 레시피를 적어주면서 말하던 요리왕 지수 언니가 눈에 선하다. 3분 카레처럼 하면 된다는 언니 말에 용기를 얻어 시도했던 메뉴. 첫 성공 후, 자신감을 얻어 자주 했던 요리라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다. 깍둑설기한 닭가슴살에 밑간을 하고, 감자 당근 양파를 큼지막하게 썰었다. 레시피에는 없지만 애들이 좋아하니까 당면도 불려서 넣어야지. 마지막으로 양념장 만들 차례. 이것만큼은 눈대중이나 변형 없이 지수 언니가 알려준 레시피 그대로 한 숟가락씩 계량해 만든다. 썰고, 볶고, 끓여서 순식간에 완성한 간장 닭조림. 고슬고슬한 흰 밥에 양념된 감자와 닭고기를 비벼서 먹으면 어찌나 맛있는지. 둘째는 두 그릇이나 뚝딱. 오늘 저녁, 우리 모두 든든하게 잘 먹었다.
보물 1호까지는 아니도 Top 5 안에는 들어가는 내 꼬질꼬질한 레시피 북.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요리 모음집인 데다 감사한 인연들에게 닿을 수 있는 비상 연락망이기도 하니까. '오늘 뭐 먹지?' 하는 비상시에는 늘 제일 먼저 찾아보는 책이니까.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주는 고마운 해결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죽 하나도 못 끓여 레시피를 찾아야 했던 요리 무식자였는데... 감사한 인연들 덕분에 오늘도 우리 넷 이만큼이라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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