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이사하기 #2
어언 19년 전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5월 28일 화요일. 남편과 내가 ‘오늘부터 우리 1일이야’ 했던 날. 그렇게 ‘우리’가 탄생한 날이기에 화요일과 28이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미신이나 토테미즘에 심취한 건 아니지만, 가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달력을 들춰본다. 화요일이나 28일에 할 수 있을까 가늠을 해보기 위해서. 예를 들면 집 계약을 하기로 결정했으면 화요일에 서명을 해도 되는지 알아보고, 남편 연구 논문 제출 기간이 아다리가(?) 맞는다 싶으면 28일에 보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매번 원하는 결과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만 왠지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화요일과 숫자 28.
아무것도 아니라고 흘려보내면 우연이 되고, 마음을 주고 굳게 믿으면 필연이 된다던데. 무한대의 숫자 중 딱 하나, 진한 믿음을 주고 특별대우를 해 주어서일까? 28이 우리에게 또 한 번 일생일대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무려 내 집 장만이라는 초대형 행운을!
작년 이맘쯤, 이제 월세 살이를 청산하고 내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고시 공부하듯 집을 알아봤다. 남편은 저러다 내가 부동산에 취직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고. 하루 두세 시간씩 인터넷을 쥐 잡듯 뒤졌다. 콜체스터에 나온 모든 집의 내외관과 위치, 가격을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가열차게 미래의 우리 집을 찾아다녔다. 허나 그렇게 열심히 찾아도 내 집이 될 만한 집은 쉬이 내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 건지… 마음에 들면 비싸고, 집도 가격도 마음에 들면 위치가 안 좋고, 모든 게 마음에 든다 싶어 다음날 남편과 상의하려 다시 찾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좌절에 좌절을 거듭할 즈음 친구의 소개로 새로 건설 중인 주택단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주제에 새집이 가당키나 하겠어…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좋은 집 구경이나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모델하우스라도 보기로 했다.
‘너였구나! 여기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첫눈에 알아보았다. 이게 바로 우리 집이 될 거라는 걸. 고속도로와 근접한 위치라 교통도 좋고, 적당한 크기에 집 구조도 마음에 쏙 들었다. 여러 집이 붙어있는 테라스 하우스지만 끝 집이라 세미 디테치드라 불리는 반 단독주택이나 마찬가지. 붉은 벽돌로 마감될 외관 예상도는 어릴 적 살던 빨간 벽돌 이층 집을 떠올리게 했다. 결정적으로 Help to Buy라고 생애 첫 주택 구매자를 위한 정부 대출까지 나오는 집이라 자금 조달도 가능! 우리의 적지 않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집이라 큰 고민 없이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꼬불쳐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송한 우리 집. 계약을 할 때만 해도 ‘신축 426번’이었는데 완공이 거의 다 될 무렵 받은 집주소가 ‘ XXX로 28번’! 그렇다. 우리 집이 28번지란다!! 안 그래도 신통방통 고마운 집인데 28번 지라니. 남편과 나는 이 집은 우리 집이 될 운명이었나 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헌데 코로나 때문에 28번지 우리 집이 3월, 5월, 6월 이렇게 세 차례나 완공일이 미뤄졌다. 피 같은 4개월치 월세를 더 내며 기다리려니 속이 터지고 골치가 아팠다. 갑갑한 마음에 아직도 공사판인 집을 일주일이 멀다 하고 다녀왔다. 내가 간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지난한 기다림에 28번지 집을 향한 부푼 기대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 건설사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 집 완공일이 7월 28일이라고. 28일부터 우리가 이 집의 온전한 법적 소유자가 된다고! 그야말로 28의 행운.
28일 완공일, 생애 첫 내 집 열쇠를 받기 위해 28 번지 집에 도착했다. 열쇠를 건네받고 집에 들어서면 감격의 눈물을 쏟을 줄 알았는데, 그저 어안이 벙벙. ‘이게 정말 우리 집이라고? 이 모든 게 3초 후에 깨어나는 달콤한 악몽은 아니겠지? 다들 일 처리는 잘했겠지? 갑자기 서류상의 문제가 있다며 집을 도로 내놓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려나…’ 행여 내 숨소리에, 내 발자국 소리에 지금의 행복에 금이라도 갈까 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걸음도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 다니며 주인 몰래 남의 집을 훔쳐보듯 조심조심 집을 둘러봤다.
“Congratulations on your new house!”
새하얀 주방에 오니 건설사에서 준비해 놓은 선물 꾸러미와 카드가 보였다. 눈에 띄는 ‘YOUR HOUSE’ ‘휴우. 내 집 맞는구나.’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본다. 내 집 마련을 축하한다며 준 선물은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시원한 샴페인과 예쁜 샴페인 잔 세트. 생각지도 못했는데 센스 있는 건설사 덕분에 자축의 건배를 챙챙! 샴페인을 나눠 마시며 남편과 함께 우리의 믿음에 감사를 더해본다. 28은 분명히, 확실히, 진짜로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숫자라고. 우연을 갖고 뭔 호들갑을 떠냐고, 그렇게 다 꿰맞추면 행운이 아닌게 뭐냐고, 꿈보다 해몽 아니냐고 지적한다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만.
28일에 만난 우리.
28일에 들어온 28번지 우리 집.
앞으로도 우리를 찾아올 많은 행운에 감사하며 이 집에서 오래오래 잘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