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꾸러미를 챙겨야 하는 장인정신 아날로그 독일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몇 주, 몇 년, 몇 세기를 거슬러 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유유자적 과거 여행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쿵! 하고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힌 소리를 들은 순간. 딱 5초만, 그것도 너무 길다면 딱 3초만 시계의 초침을 돌리고 싶다. 그럴 수 만 있다면 열쇠를 챙기거나, 문이 닫히지 않게 내 발이라도 쭉 뻗어 놓는 건데. 어떻게 안될까요, 제발? 하느님, 부처님, 온갖 천지 신령님을 찾으며 간절한 기도를 바쳐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 불러야 할 사람은 열쇠 맨, 구원의 손길은 그에게 달려있다. 애타게 기다리는 열쇠 맨과의 만남, 독일에 오고 나서 벌써 세 번째다.
‘현관문이 닫혔으면 다시 열고 들어가면 되지 않나? 도어록 비밀 번호를 잊어버린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철두철미하고 아날로그를 사랑하며 장인 정신이 충만한 이들이 사는 독일. 그 정신세계의 정수가 바로 열쇠와 문에 달린 잠금장치에 집약되어 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도어록은 독일에서 구경을 해 본 적도 없다. 일반 가정집은 물론이고 상점이나 사무실에서도 대부분 열쇠를 사용한다. 집, 지하실, 우편함, 자동차, 사무실 거기에 자전거까지. 매일 들고 다녀야 하는 열쇠가 도대체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현관문은 한 번 닫히면 저절로 걸쇠가 걸려 열쇠 없이는 절대로 밖에서 열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분신처럼 들고 다녀야 한다.
쩔그럭 쩔그럭. 여러 개의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도 귀찮은데, 이 보잘것없는 열쇠 따위(?)를 너무나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도록,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약이 오를 때가 있다. 우리 집 열쇠 하나로 내 집 현관문만 여는 것이 아니다. 내 가족이 사는 집 문을 비롯해 건물로 들어오는 큰 현관, 건물 내 중간 현관, 뒷마당으로 통하는 후문, 지하실로 연결되는 문, 세탁실 문. 이렇게 총 6개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멀티 기능 열쇠이다. 그렇다 보니 만약 열쇠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건물 내 모든 문의 잠금장치와 열쇠를 바꿔야 한다. 모든 비용은 열쇠를 분실한 사람이 부담하는 게 원칙.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소 5000유로(한화로 700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는 거뜬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독일에서는 책임보상보험(자동차나 자전거로 제삼자를 경미하게 해친 경우나 타인의 물건을 부수거나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한 보험)에 열쇠 보험이 포함되어 있다. 생명 보험, 화재 보험, 의료 보험은 들어봤어도 열쇠 보험이라니… 독일에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다.
집 계약을 하던 날, 부동산 중개인이 집 열쇠 세 개를 건네주면서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당신네 집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이게 전부다. 건물주도, 건물 관리인도, 나도 당신네 집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안 갖고 있다. 그러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아니 그깟 열쇠가 뭐라고. 신줏단지를 맡겨도 이러진 않겠다 싶을 정도로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아니꼽게 느껴졌다. 손기술 좋은 내 나라에 가면 까짓 거 몇 벌이고 복사해 오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어휴, 이런 열쇠는 복사 못해요.”
한국에 갔을 때, 인터넷을 뒤져 어렵게 찾은 열쇠집 주인 아저씨는 열쇠를 건네받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고수는 고수이셨는지 여러 개의 잠금장치를 풀 수 있는 특수 열쇠라는 걸 한 번에 알아봤다. 독일 장인 정신을 너무 얕봤던 걸까? “진짜요? 정말 안 되나요?” 몇 번이고 되물어봐도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열쇠 하나에 이렇게나 장인 정신을 발휘할 일이야? 허탈해하면서 나서는데 열쇠 아저씨, 친절하게 뼈를 때리신다.
“안 잃어버리게 잘 챙겨갖고 다니세요.”
지독하게 잘 만든 독일 열쇠와 문의 조합. 철두철미한 보안을 생각한다면 든든하다 하겠지만, 그렇게 악착같이 지켜야 할 귀중품이 없는데… 가끔 실수도 하고, 종종 깜박하는 인간미 넘치는 나에게는 오히려 부담 덩어리일 뿐. 재작년 어느 토요일 오전, 온 가족이 동물원에 가려고 문을 나섰다. 닫은 문을 잠그려고 하는데 아무도 열쇠를 안 갖고 있네? 나는 당연히 남편이 열쇠를 챙겼을 거라 생각했고, 남편은 내가 열쇠를 잘 갖고 나왔을 거라 믿었단다. 한 번 닫힌 문을 어찌할 수 없어 처음으로 열쇠 맨을 불렀다. 몇 달 후, 우리 집 재활용 쓰레기 담당인 남편이 출장을 가고 없어 내가 쓰레기통을 들고 문 밖을 나섰다.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에게 금방 돌아올 테니 십 분만 더 보면서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밖에 나와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엄마아아아”하고 아이들이 부르는 게 아닌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내려왔다는 꼬맹이들. 그런데 아이들이 열쇠를 안 가지고 내려왔네? 나는 너희들이 집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쓰레기만 갖고 내려왔는데… 프랑스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열쇠 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그렇게 두 번의 만남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엉엉 울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둘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뒷마당에서 놀다가 혹시 넘어져서 다친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가 이웃에 민폐가 되지 않게 서둘러 아이를 불러들이고 싶었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난간 사이로 아이가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넘어졌어? 괜찮아? 얼른 들어와.”라고 말하는 순간 쿵! 열어 둔 현관문이 바람에 밀려 세게 닫혀 버렸다. 열쇠랑 핸드폰은커녕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나왔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우리 집 열쇠를 나눠가진 단 한 사람인 남편은 학회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가고 없는데… 왜 하필 남편이 출장 가고 없을 때만 이러는 거야. 정말 3초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아아아아!!
눈물 콧물 빼며 우느라 얼굴이 꼬질꼬질해진 둘째와 땀범벅이 되어 뒤늦게 합류한 첫째를 데리고 아래층 아너트 할머니 댁으로 갔다. 각설이 같은 우리 꼴에 깜짝 놀라신 할머니께 여차저차 사정을 설명하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달라 부탁했다. 열쇠 맨은 20분 만에 도착했고, 그의 손길에 우리 집 현관문은 10초도 안되어 활짝 열렸다. 이렇게 내 집으로 들어가는 데 드는 비용은 무려 120 유로. 한화로 따지면 15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저녁 7시를 넘긴 늦은(?) 시간이라 기본요금에 20유로가 추가된 금액이라나 뭐라나. 계산을 하려고 체크카드를 꺼내 들었더니 현금만 받는단다. 이놈의 지독한 아날로그 사랑! 독일은 기술 강국 아닌가요? 21세기 첨단 디지털 시대에 도어록은 왜 안 달고, 카드 결제는 또 왜 안 해주는 겁니까! 수중에 그만큼의 현금이 없었던 나는 결국 아이들이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잠깐 빌린 것이고 당연히 이자까지 쳐서 갚을 것이지만, 코 묻은 애들 돈까지 날린 한심한 엄마가 된 것 같아 속상했다.
그날 저녁, 아너트 할머니께서 우리 집 열쇠 하나를 맡아 주시겠다고 했다. 아너트 할머니라면 우리 집을 통째로 믿고 맡겨도 안심할 수 있으니 그 제안을 덥석 받아 물었다. 남편과 내가 하나씩 나눠 가진 후 비상용으로 하나 남은 열쇠를 큼지막한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에 끼워 할머니께 건네드렸다. “아이들이 놀랐을 텐데 괜찮니? 이제 문이 닫히면 언제든 나에게 오렴. 너희 집 열쇠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 걱정 마.”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에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열쇠 스트레스가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열쇠 때문에 독일식 아날로그가 어쩌니 저쩌니 궁시렁거렸는데… 덕분에 이웃의 정을 느끼게 됐다. 이런 아날로그라면 대환영. 그래, 도어록도 없고, 가끔은 내 정신머리도 없지만 믿을만한 이웃은 있잖아. 이제 열쇠를 잊고 나와 집에 못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열쇠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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