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잡고 그리운 얼굴도 만나고
조용하고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3월이 되었다고 햇볕도 수줍은 얼굴을 잠깐이지만 살짝살짝 내비치던 아침이었다.
완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먼저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이들은 거실에서 레고를 만들며 놀고 있었고, 꿈지럭대다 느지막이 일어난 우리 부부는 애들이 좋아하는 와플을 굽고 있었다. 고소한 버터향을 풍기며 와플이 구워지는 동안, 나는 곁들여 먹을 싱싱한 딸기를 찬물에 씻어서 자르고 있었다. 곁에서 남편은 아이들이 마실 우유를 잔에 따르고, 어른들이 마실 차를 끓이고 있었다.
"띵-동-"
유난히 요란하게 울리는 것 같이 느껴지는 문자 메시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집어 남편과 함께 읽어 내려갔다. 첫 줄을 읽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신음을 내뱉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방을 나와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아이들은 여전히 잘 놀고 있었다. 조그만 손으로, 더 조그만 레고 조각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멋진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별 다른 일 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큰 아이가 손을 들어 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쪽 귀 구레나룻 위쪽이었다. 가져간 손을 갈고리처럼 세우더니 머리칼을 긁기 시작했다. 아주 세게. 벅벅.
"아...이다. "
그걸로 우리의 짧디 짧았던 완벽한 토요일은 끝이었다.
문자는 큰 아이 학급 부모들이 만든 단체 채팅방에 필립 아빠가 보낸 메시지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 집 애 이 있어요!!! 아직 알이 없는 걸 봐서는 얼마 안 된 거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들 애들 머리 검사해 보세요. 토요일 아침부터 미안해요."
5분 정도가 지나자 단체 창에 연이어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우리애는 괜찮아요."
"일찍 알려줘서 고마워요. 우리 애도 지금 샅샅이 뒤져봤는데 아무것도 없네요."
"이상 무!"
한 반에 아이들이 25명 씩이나 있는데 어째 다들 무사하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도 다 이에 옮았으면 좋겠다는 놀부 심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두 명 정도의 동지가 있으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내심 기다리는 했다. 종종 학교에 이가 돈다는 공고가 붙긴 하지만 아프리카도 아니고 독일, 그것도 도심 한가운데 있는 학교에서 정말 이가 있을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런데 독일 생활 2년 몇 개월 만에 이에 당한 것이다. 이에 공격당한 것도 분한데, 하필 우리 애만 옮아 온 것 같아 살짝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꾹꾹 눌러 짧은 고해 문자를 보냈다.
"우리 애는 이 있어요. 주말 동안 잘 처리해서 학교 보낼게요."
조금 오버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도 여타 전염병처럼 초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탄탄한 팀 워크, 빠르고 정확한 결정, 그리고 신속한 행동이 가정과 학교 내에서의 2차, 3차 감염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박멸 작전을 세워 하나하나 실행하기 시작했다.
1. 환자 격리: 일단 둘째는 이가 없는 것 같으니, 둘을 격리시켜 추가 피해를 막아야 한다. 아이들을 각자의 방에 가두고, 불만이 없도록 충분한 간식과 장난감 그리고 만화책을 넣어줬다.
2. 의약품 조달: 현재 시각,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동네 약국은 토요일 오전에는 두세 시간 동안만 영업을 한다. 이 약국이 문을 닫으면 주말 당번 약국을 찾아가야 하고, 그러면 사태가 악화될 시간만 벌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남편은 동네 약국이 문을 닫기 전에 당장 이 퇴치용 샴푸나 약을 사 온다.
3. 1차 방역: 남편이 약국에 간 동안, 난 큰 아이의 동선을 따라가며 오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품을 수거한다. 아이의 옷가지와 모자는 물론 침대 시트, 이불보, 베겟잇, 수건 그리고 거실에 있는 무릎 담요까지 재빠르게 걷어 세탁기에 넣는다.
4. 2차 방역: 아… 생각해 보니, 어제 큰 애가 우리 방 침대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놀았다. 우리 방 오염 물질도 수거.
5. 집중치료: 남편이 의약품을 들고 도착했다. 오일 스프레이를 머리 전체에 고루 뿌리고 몇 시간을 두면 이가 기름 때문에 질식한다는 약사의 설명에 따라 처지를 시작한다.
환한 햇살이 비치는 밝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일 스프레이를 뿌리며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이따금 가려운 머리를 긁으려는 아들의 손을 밀어내며 아이의 머리를 구석구석 훑었다. 비록 이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이의 머리를 한 올 한 올 이리도 정성스레 매만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원수 같은 이를 빨리 죽여야겠다는 급한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 들었다. 대신 아이가 얌전이 내민 짱구 뒤통수가 예뻐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렇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노라니 머릿속엔 몽글몽글 딴 세상이 그려진다.
엄마와 내가 있다. 고모와 할머니도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볕이 잘 드는 밝고 따뜻한 날, 우리는 모두 시골 할머니 댁 부엌에 앉아 있다. 바닥에는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커다란 달력 한 장이 깔려 있다. 검고 빨간 숫자가 칸칸이 새겨진 달력을 흰면이 보이게 뒤집어 놓았다. 머리를 풀어헤친 나는 달력 위에 올라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내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도 달력 위에 자리가 남는다. 엄마는 내 머리를 촘촘한 참빗으로 빗어내리고 있고, 막내 고모는 다른 한쪽에 자리를 틀고 앉아 내 머리를 뒤적이고 있다. 엄마는 참빗질이 쉽지 않으신 모양인지 입술을 앙 다무셨다. 시집도 안 간 젊은 고모는 징그럽다면서 온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도 이를 찾으면 양 엄지손톱 사이에 놓고 톡 소리가 날 때까지 옴팡지게 눌렀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칭얼거리 고있다. 처음에는 고개가 아프다 했고, 좀 이따가는 머리를 끄들렀다며 팩 토라졌고, 이제는 다리가 저린다며 징징거리고 있다. 아까부터 엄마는 "거의 다했어, 좀만 참아"라고 하시며 대충대충 달래고 계신다.
거짓말. 아직 반도 못했으면서…
엄마는 한참이나 더 그렇게 내 머리를 들추며 살피셨다. 그날 엄마의 손이 닿지 않은 머리카락은 아마도 한 올도 없을 것이다.
"엄마, 언제 끝나?"
아들의 목소리가 나를 머릿속 세상에서 2017년 3월 독일로 불러냈다.
"응, 거의 다했어. 좀만 참아."
대충 달래니 아이가 조용해진다. 거짓말이다. 실은 앞으로도 15분은 더 그렇게 얌전히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15분 사이에 똑같은 거짓말을 몇 번 더 하게 되겠지. 배배 몸을 꼬는 아이에게 쓸데없이 참말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괜히 고개만 더 아프고, 다리만 더 저리게 될 테니까. 엄마도 그래서 나한테 거짓말을 친 거구나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길었던 잿빛 겨울이 저만치 멀어지고 3월과 함께 봄이 가까이 왔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꽃망울과 새싹이 터질랑 말랑 하면서, 괜히 내 마음도 울렁울렁거렸다. 여름에 가는 한국행 비행기표까지 끊어 놓고 나니, 부쩍 보고픈 얼굴들이 많이 생각났었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이제는 대학생 아들을 둔 막내 고모도 보고 싶었고, 시골집을 홀로 지키고 계신 할머니 생각도 많이 났다. 언제 만나나, 이 봄이 가고 한여름이나 돼야 보겠지 했는데… 아들이 이를 옮아 오는 바람에 오늘 내 그리운 얼굴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봄 햇살이 가득한 날, 사랑하는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보고픈 사람들은 만난 아침.
완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