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이로 7살인 우리 둘째 노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유치원 내 최고 고참 어린이이다. 학교 입학이 코 앞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7살이 되면 공부를 안 하던 아이들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다고 한다. 교육열 높은 강남의 이야기는 제쳐 둔다 하더라도, 유치원에서 한글은 기본이고, 수학에 영어도 가르치고, 어떤 유치원에서는 일곱 살 어린이들이 한자 능력시험도 준비한다고 한다. 하얀 티에 체크무늬 아랫도리를 깨끗하게 차려입고 책상에 앉아 점잖게 공부하는 한국의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지체 높은 영국 귀족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우리 집 노아를 포함한 독일 유치원생들의 모습은 한 마디로 신난 각설이 같다. 흙먼지 묻은 허름한 옷차림에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서 신나게 날뛰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오 신이시여, 저 꼬질꼬질한 애가 정녕 제 자식이란 말입니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독일 어린이들은 유치원에서 도대체 뭘 하길래 각설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독일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놀고먹는다. 진짜로 놀고먹기만 하냐고 물으실 까 봐 그 놀고먹는 스케줄을 상세히 읊어 보겠다.
8:00-8:15 유치원은 7시 정도에 문을 열지만 8시는 되어야 아이들이 하나둘 모인다. 이 시간쯤에 일찍 유치원에 오는 아이들은 도시락 통에 싸온 아침을 먹는다. 우리 집 노아는 집에서 아침을 먹었지만 사과 한쪽이나 요구르트 하나 정도를 들고 가 두 번째 아침식사를 한다.
9:00 모르겐 크라이스 (Morgenkreis) 시간. 반 친구들과 선생님이 둥글게 모여 앉아 인사도 하고, 노래와 율동을 하는 시간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치원 활동이 시작한다. 보통은 이때 작은 바구니나 접시에 과일을 담아 나누어 먹는다. 포크 따윈 필요 없다. 그냥 손으로 주워 먹으면 된다. 생일인 친구가 있으면 같이 노래도 부르고 컵케이크도 나눠 먹는다.
9:30 실내 활동 시간. 책 읽기, 만들기, 그리기, 악기 놀이 등등 다양한 실내 놀이를 한다.
10:00 길지 않은 실내 활동이 끝나면 한 10시쯤 아이들은 유치원 정원이나 근처 공원에 가서 야외활동을 한다. 신나게 뛰고, 소리 지르고, 뒹굴고, 기어 올라가고…. 그렇게 온몸으로 에너지를 내뿜으면서 논다.
11:00 한 시간 정도 실컷 놀고 11시쯤이면 유치원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한다. 11:45 점심 식사를 마치면 아이들은 낮잠 잘 준비를 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한다. 잠옷도 혼자 갈아입고, 낮잠 매트를 가져다 이부자리를 펴는 것도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 자기 싫어도 누워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든다. 우리 애들은 이 낮잠 시간을 싫어한다. 자기는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에너지가 많아서 괜찮다고 우긴다. 하지만 선생님은 쉬어야 더 잘 놀 수 있다며 30분 정도는 조용히 누워 있으라 하신다.
13:15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정가 지나면 잠들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사리 손으로 자기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잠옷도 갈아입는다.
14:00 오후 2시가 되면 간식을 먹는다. 엄마가 오후 간식을 싸 줘야 하는 곳도 있고, 유치원에 간식비를 내야 하는 곳도 있다. 점심 먹고 나서 한 일이라곤 낮잠 잔 것뿐인데, 아이들은 또 배가 고픈지 요것 저것 잘도 먹는다.
14:30이 때쯤 되면 아이들은 간식을 다 먹고 오후 활동에 들어간다. 잠도 잤겠다, 간식도 먹었겠다 이제 놀기만 하면 된다. 어지간히 날씨가 나쁘지 않은 한, 아이들은 오후 시간을 유치원 정원에서 보낸다. 해가 긴 봄, 여름에는 유치원이 문을 닫는 5시 까지, 해가 짧은 가을, 겨울에는 3- 4시까지 아이들은 밖에서 신나게 논다.
이 정도면 놀고, 먹고, 놀고, 먹고를 반복한다는 거, 참말 맞다. 가끔 병원 약속이 있어 점심때 아이를 데리러 가 보면, 아침에 매만진 내 손길의 흔적이 남아 있어 아이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낮잠도 자고 나서 오후에 유치원 정원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보면, 내 아이뿐만 아니라 모두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여자 아이들의 기본 헤어 스타일은 산발. 낮잠 자면서 이리저리 비비고, 또 놀면서 헝클어져 꼭 머리 끄덩이 잡고 한바탕 싸운 모습이다. 자고 나서 옷을 뒤집어 입은 아이도 꽤 있고, 그나마 제대로 입은 옷도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어 지저분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여름에는 땀에 쫄딱 젖어 이마에 쫙 늘어 붙은 머리카락이, 겨울에는 코에 매달린 누런 콧물이 기본 옵션이다. 이렇게 각설이 같은 모습을 하고 노니 예쁘고 비싼 옷은 유치원에 입혀 보낼 수 도 없다. 얼마나 열심히 노는지 바지마다 무르팍이 남아나질 않는다. 아니 요새 세상에 청바지에 구멍이 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냔 말이다.
성한 무릎이 없는 불쌍한 청바지. 각종 캐릭터 모양의 패치로 덧대어 입힐 수 밖에...
하루는 데리러 갔더니 아이가 무릎이 다 까진 채로 땅바닥에 앉아 빠락빠락 울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이, 야트막한 내리막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 급커브를 하면서 자전거가 뒤집어졌단다. 말로만 들으면 어마 무시한 전복사고였지만,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이의 꼬락서니를 보고 나니 걱정되는 마음은 쏙 들어가고 헛웃음만 나왔다. 흘러내리는 땀과 눈물에 흙먼지가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이 어찌나 꼬질꼬질하던지…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제일 먼저 하는 걱정은 바로 하원길이다. 머리를 재빨리 굴려 흙먼지 투성이인 아이와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해 본다.
'이 그지 꼴을 하고 있는 애를 어떻게 데려가지… 집에 가는 길에 분명 다리 아프다고 안아달라고 할 텐데…아… 저 드러운 손으로 매달리면 내 옷까지 다 버리겠는데… 안 되겠다. 가는 길에 있는 빵집에서 빵이라도 하나 사주고 좀 쉬었다 가야겠다. 유치원 나가서 모퉁이만 돌면 되니까 그 거리는 징징 거리는 채로 걷게 내버려 두자. 좋아하는 빵 사주면 그거 먹어야 하니까 손은 순순히 씻을 것이고, 또 먹고 나면 기분도 좀 풀려서 안아달라고 안 하겠지?'
애들을 각설이 거지꼴로 만들어 놓은 독일 유치원 정원. 엄마인 나 로써는정원 때문에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유로짜리 반짇고리에 들어있는 싸구려 실과 바늘로 구멍 난 청바지도 기워야 하고, 세탁기도 매일 돌려야 한다. 애들 신발에서 한 움큼씩은 나오는 모래도 매일 저녁 잊지 않고 비워줘야 한다.
공원이나 다름없는 유치원 정원
그래도 난 독일 유치원 정원이 정말 좋다. 말이 정원이지 공원이나 다름없는 독일 유치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우레탄이나 폐타이어로 덮인 놀이터 바닥은 여기서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넓은 정원은 모래나 자갈 바닥이거나 잔디로 덮여있다. 놀이기구도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여름에는 뜨껍고,겨울에는 차디찬 쇠나 플라스틱도 잘 쓰이지 않는다.
나무도 많아 아이들이 계절의 변화를 매일 느낄 수 있다. 그것도 온몸으로!
아직은 쌀쌀한 초 봄, 하얀 꽃이 만개한 사과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5살 아들이 말한다.
"엄마 저 나무 있잖아. 나무에 팝콘이 달린 거 같아……정말 예쁘다."
여름에는 키 큰 도토리나무와 마로니에 나무가 정원 가득 그늘을 만들어 준다. 신나게 놀아 얼굴이 벌게진 아이들이 쉬고 싶을 때면 에어컨이 아니라 , 기대앉을 곳이 있는 나무 그늘 아래를 찾아간다. 가을에는 땅에 떨어진 열매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이 되어준다. 도토리, 호두, 마로니에, 너도밤 등 이름도 모양도 제각각인 열매는 그저 줍기만 해도 재미있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누가 먼저 찾나 보물찾기 놀이를 해도 재미있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이 덩그러니 서 있는 겨울에도 정원은 활기차다. 형형 색색의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어린이들은 땅에 널브러진 나무 막대기를 모아 새집을 만든다. 비록 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쏟아지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그 집으로 이사 오는 새가 한 마리도 없지만 말이다.
흙과 나무와 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품은 유치원 정원.
그곳에서 계절의 오고 감을 보고 배우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놀잇거리를 찾아내는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