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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산-상

퀴어 초단편 옴니버스 소설집 <사랑은 이상하고> 세 번째 소설

by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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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이요?


핸드폰을 둔 최광록의 목소리가 커지자 곁에서 담배를 피우던 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옆 부서 팀장 배다정이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구청 앞 화단까지 와서 받은 전화였다. 자신이 낸 목소리 크기에 자신이 놀란 최광록이 황급히 핸드폰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죄송한데, 근데 저기. 아니 제가 왜. 그러니까 이게 제가 전화를 지금 구청에서 받느라고. 아니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다고요?


변호사는 최광록의 고모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배우자나 자녀도 없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므로 형제자매가 상속의 우선순위인데, 그녀의 유일한 형제인 최광록의 아버지 역시 살아계시지 않으므로 다음 차례는 4촌 이내의 방계혈족인 최광록이라고 했다. 최광록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므로 이 낯선 전화가 신종 보이스피싱은 아닐지 의심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유산이나 방계혈족 같이 드라마틱한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재미없기로는 주차관리과에서 손에 꼽힐 만한(그것이 최광록이 사람들의 손에 꼽힐 수 있는 유일한 주제였다) 이의 일상에서 듣기에는 더욱더. 최광록은 서대문구청 주차관리과 8급 주임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민원, 과태료, 소방활동이 아닌가 짐작했다. 잠이 오는 밤이면 혼자 천장을 바라보며 언젠가 늙은 토끼처럼 사육장에 누워 죽어갈 때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100배속으로 돌린다면 구청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누군지 모를 시청자에게 지루함을 주지는 않을까.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배팀장이 툭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졌다. 비밀로 할게요. 여름 바람이 화단 앞에 멀뚱히 선 최광록의 휑한 이마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최광록은 비로소 제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무도 제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가슴에 손을 얹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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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록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현수 주무관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마어마한 유산 받아서 공무원 때려친다며?」

「아니, 그걸 어떻게. 그게 아니라요. 그게 제가 모르는 사람이 건 전화라. 배팀장님, 참 사람이. 아니, 그나저나. 누가 그래요?」

최광록은 중언부언 되물었다. 비밀로 한다더니! 말은 최광록이 일 층에서 사 층까지 걸어오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직원들에게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엉뚱한 상상까지 덧붙여진 채로. 그러고 보니 그가 사무실로 돌아올 때 그를 보던 직원들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랐던 것 같았다. 평소에는 그가 자리를 비워도 직원들은 그가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기다 아니다 말만 하면 되지.」


최광록은 유산 운운하는 전화를 받긴 했으나 보이스피싱인지 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며,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규모조차 전해 듣지 못했으니 분명 별일 아닐 거라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보니 실은 별일인 것 같았고, 대단한 유산을 거머쥘 것 같았으며, 그의 인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만 같았다. 최광록은 침착해 보이기 위해 모니터를 바라보려 애썼지만,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과연 그게 착각은 아니었는지, 점심시간이 되자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모두가 최광록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고모랑은 사이가 어땠어요? 유산이 어쩌다 조카한테 왔대요? 유산 받으면 공무원 그만둘 거예요? 질문은 많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건 하나였다. 유산이 얼마래요? 최광록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얼이 빠졌지만, 모두의 시선에 흥분해서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담백하게 요약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엉뚱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고모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대학시절을 어렵게 보냈다는 이야기,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신 걸로 보아 집안 대대로 단명을 할 것 같다는 이야기. 유산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고 최광록의 이야기를 꾹 참고 듣던 직원들은 느닷없는 가족사에 눈에 띄게 흥미를 잃어갔다. 한 둘씩 핸드폰을 쳐다보기 시작했고, 최광록과 한 자리를 건너 띄고 앉은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최광록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마침내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게 확실해지자, 그는 입을 닫았다. 그래도 이만한 관심을 받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높낮이 없는 어조, 알맹이 없는 주제, 끝날 듯 끝날 듯 결코 끝나지 않는 문장은 누구도 최광록의 이야기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식사가 끝난 후 최광록은 화장실에 앉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찰나의 순간을 떠올렸다. 곱씹을수록 짜릿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예인 하는 건가? 인플루언서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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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도록 최광록은 전화의 진위여부를 파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일이 바빠 그렇다고 말했다. 최광록은 내심 그 일이 꿈같은 해프닝으로 끝날까 봐, 그리하여 그를 잠시 비추었던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지고 영원히 불꺼진 무대에 남을까 두려웠다. 확인하지 않는 한 그 일은 언제까지고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십억, 어쩌면 백억일까? 그렇다면 일단 집부터 사야하겠지? 다들 이럴 때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사던데, 그건 얼마일까?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가 출근해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거나 자판기 앞에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 몇 초 동안, 유산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최광록은 유산이 넉넉하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어쩌면 지난 한 주간 자신이 받은 관심이 평생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대감이 두려울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사랑은 이상하고>는 이상한 사랑에 대한 퀴어 초단편 옴니버스 소설집입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브런치를 통해 공개합니다. <사랑은 이상하고>는 소설 배달 서비스 <주간 정만춘> Season1으로 2024년 여름, 연재했었던 콘텐츠입니다. <주간 정만춘>은 새로운 장르로 지금도 연재 중이니 신청을 원하시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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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사랑은 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요.

이상해 보이지만 듣고 보면 또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변명. 자세히 보아야 멀쩡하고, 오래 보아야 이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옴니버스 초단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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