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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May 03. 2021

비극의 평범성

210420 춘천 첫서재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시체 주변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시체들이 노트북과 태블릿 PC 주변에 널려 있었다.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게 살생의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쌀알보다 작은 또 한 마리의 개미가 내 손등을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한시간 전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때는 햇빛이 따가웠던 터라 카페 안에 앉아 있었다. 한참 할일에 집중해 있는데, 왕벌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 주인에게 상황을 알리자 주인은 놀란 눈으로  전기 파리채를 손에 쥐었다. 나는 가까운 지인이기도 한 주인이 벌을 잡는 모습을 잠시 구경했다. 그는 답답하게도 전기 파리채를 적극적으로 휘두르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 내보내야 되는데." 주인의 얼굴엔 살생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그는 벌을 문밖으로 유인하며 탈출할 시간을 주었다. 전기채를 휘두를까 말까 머뭇거리던 주인의 얼굴이 생각나자 지천에 널린 개미들에 대한 쌀알같은 죄책감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손등 위 작은 생명체를 밑으로 내려주었다.


첫서재 라일락 나무 아래서(카페 주인이 찍어주심)


지금이야 작은 카페의 온화한 주인이지만 2017년의 그는 엄한 직장 상사였다. 방송국에서 인턴 기자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가스 검침원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한 기사를 첫 아이템으로 발제하자 그는 단번에 퇴짜를 놓았다. 너무 흔한 소재를 너무 흔한 방식으로 디루려는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때 덧붙인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네가 쓴 기사가 그저 그런 기사 중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어딘가 새로워야 해. 그게 취재에 응해준 사람에게 지켜야 하는 일종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 그때부터 나는 '뻔한' 아이템을 새롭게 전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작은 개미의 죽음에 무감한 것처럼 세상에는 너무 반복돼서 익숙해진 비극이 있다. 이를테면 산재 사망이 그렇다. 한해에 평균 2500명~3000여명이 산재로 죽는다. 떨어지고, 불에 타고, 무너진 철근 더미에 깔린다. 하지만 반복되는 죽음은 충격적이지 않다. 죽음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평범해지는 순간이다. 이 사실은 가끔 기자들을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평범한 비극은 기사에 쉽게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민할 것이다. 이 보편적인 비극을 어떻게 특별하게 전할지.


비극이 익숙해지는 것만큼 잔인한 비극이 어디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쩌면 기자의 중요한 역할은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익숙해진 비극 역시 비극임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자들은 죽고 다친 누군가의 이름 혹은 정보가 실린 그 기사가 그저 그런 기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낼 것이다. 그런 고민이 녹아든 기사들이 모여 비극의 평범성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왕벌 한 마리도 섣불리 죽이지 않으려는 카페 주인의 머뭇거림이 나를 멈추게 한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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