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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Nov 18. 2019

질문에 답하기

feat. 아무말

#질문에답하기

-‘0’이 발견된 것은 아침이었을까요, 밤이었을까요?

: 0은 숫자의 시작을 정하기로 마음먹은 어느 수학자가 새벽 3시 쯤 ‘에잇 몰라’를 외치며 만들었다. 그는 숫자의 시작점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숫자의 시작을 기호화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고민했다. 아무래도 시작이니까 조금은 거창한 게 좋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 수를 세고 이를 통해 소유를 증명하고, 순서를 매기고 또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체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숫자 표기’아닌가. 앞선 수학자들은 이 위대하고도 위대한 일에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니 숫자의 처음은 얼마나 중요했을까. 그는 하루 종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밤이 찾아왔다. 그런데 밤은 좀 특이한 시간이다. 밤엔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다가 결국 과감히 단순해지곤 하는 시간이다. 합리화가 너무 잘 돼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합리화라는 것조차 잊는 시간이다. 뭐라고 명명할까. 어떤 모양으로 정할까. 긴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그는 생각의 끈이 점점 헐거워져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내다가 불현듯 단순해지기로 한다. 그리고 ‘에잇 몰라!’를 외치며 동그라미를 그렸을 것이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가늘고 긴 동그라미를 숫자의 시작으로 명명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그는 어쩐지 공허했을 것이다. 기나 긴 여정의 끝이 이렇게 단순해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시작을 정했다는 일에 만족감을 느끼며 잠에 들었을 것이다. 창밖이 새벽녘으로 조금씩 밝아오는 것을 흘끔 쳐다본 뒤에 발을 쭉 뻗고 말이다.  

숫자의 시작이 이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조금은 공허한 이유로 정해졌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속이 비어있는 0의 모습에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이 공허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텅 빈 마음으로 시작한 일도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시사하는 것 같아서. ‘에잇 몰라!’하면서 아무렇게나 일을 시작하고 싶다. 그래도 되는 시간은 아무래도 아침보단 밤이다.

-사물의 겉과 속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 써보면 구별이 가능하다. 일단 내 방만 봐도 그렇다. 냉장고는 ‘냉동실’과 ‘냉장실’로 나뉘어져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가구로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는 쓰레기통이다. 엄마가 달마다 보내주는 김치도, 호기롭게 다이어트를 선언하면 사 모은 온갖 건강 보조 제품과 곡식 가루들도, 돈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밥을 해먹겠다는 다짐으로 사 놓은 야채들도 썩어가고 있다. 먹으면 병에 걸릴 쓰레기들이 넘쳐난다. 음식을 얼리라고 존재하는 주제에 매달 도착하는 엄마의 온기를 얼리고, 뜨겁던 내 여러 다짐을 차갑게 식히고 있다.

  에어컨은 절대 산소 호흡기처럼 안 생겼지만 여름이면 산소 호흡기나 다름없다. 없으면 실내에서 숨을 못 쉬어먹겠으니까. 사람들은 한여름에 무심코 에어컨이 고장 난 건물에 들어갔다가 마치 호흡곤란이 온 환자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헉헉대며 다시 에어컨을 찾아 나서지 않는가.  

  핸드폰은 겉으로만 봐선 절대 약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헤로인보다 심각한 중독성이 있는 신종 마약이고, 컴퓨터는 겉으로만 보면 인간에게 쓰임을 받고 있지만 실제론 인간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검색창은 겉으로만 보면 인간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인간의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삭제하고 있다.

  사물은 오래 써보면 그 본질을 안다. 문제는 오래 쓰면서 그 사물에 익숙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땐 이미 본질대로 그 사물을 쓰기엔 많이 늦은 때다.

 

-당신이 살아가는 이상적인 속도가 있나요?

: ‘빠르다’나 ‘느리다’나 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판단이다. 시속 100km는 자전거에게는 빠른 속도지만 우주선에게는 코웃음이 나오는 속도 아닌가. 우리 삶은 자전거를 타는 순간도 있고, 우주선을 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타든 나는 창밖을 내다봤을 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속도로 달리고 싶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우주선 안에서도 우주를 유영하는 별을 구경하고 싶고, 자전거를 타서도 내가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힐끗거리고 싶다. 그게 적당한 속도다. 세상을 눈에 담기에 충분한 속도. 그와 더불어 내 옆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속도. 그런 속도로 살아야 내가 잘 걷고 있는지 ‘방향’을 확인할 여유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

p.s)

인스타그램을 하다보면 자전거를 타면서도 행복했던 나는 갑자기 왜 그동안 아우디의 속도로 달리지 않았는지 불평하게 된다. 삶의 속도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더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데, 하는데 하면서 우울해진다. 그러면 당장 아우디를 탈 수 없는 상황이면서 자전거 페달 밟기도 싫어진다. 그 시간에 페달이나 열심히 굴리는 게 훨씬 나은데 말이다.

-고소공포증을 앓는 새도 있을까요?

: 인간은 극복하면 행복해하는 변태적인 존재다. 못하면 안 해도 되는데 꼭 극복을 해야 뭔가 해냈다는 성취를 느낀다. 자기 자신에게만 그러면 상관이 없다. 물이 무서우니 수영을 배워서 물 공포증을 극복해야겠다는 친구를 내가 무슨 수로 말리나? 그러나 그 극복 프레임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장애에 ‘극복’이란 말 좀 안 갖다 붙였으면 좋겠다. 우울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가는 것들이니까. 가끔은 극복이 안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극복은 K-드라마가 아니라 대하 장편 소설 같은 것이다.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맺어진 K-드라마 주인공처럼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니라, 끈기 있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가 진전되는 대하소설이라는 말이다. 극복은 어느 한 지점을 기점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어떤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해서 어떤 일을 극복했다고 여기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삶에는 분명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게 있다. 고소공포증을 앓는 새는 있을 수 있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새에게 높은 곳에서 날아보라고 하지 말자.

-제대로 거짓말하는 법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제대로 거짓말하는 법을 아냐고 묻지 않았다. 제대로 거짓말하는 법을 ‘얼마나’ 아냐고 물었다. ‘얼마나’라는 부사는 ‘몇 개나’라는 수를 나타내는 말처럼 들리기 보다는 조금은 비꼬는 의미로 읽힌다. 마치 “네가 아는 완벽한 거짓말하는 법이 얼마나 그럴듯한지 한 번 들어보자”는 뜻으로 들렸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따라서 끝까지 들키지 않는 거짓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거짓말을 하는 법’은 상대가 알면서 속아주고 싶게 만드는 것밖엔 없다. 나에게 속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상대에겐 제대로 거짓말을 칠 수 있다. 안 들키면 더 좋겠지만 들켜도 그만이니까.

  기꺼이 나에게 속아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결국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빠는 내가 거실 한 가운데 놓여있던 돼지 저금통에서 야금야금 돈을 빼서 쓰는 걸 알면서 눈감아줬고, 나는 그런 아빠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뺄 때 들킬까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대신 죄책감이라는 바위가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을 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데이트에 지각을 일삼았던 나는 그에게 이제 집을 나섰으면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짓말을 자주 했다. 그 거짓말은 짧은 시간 안에 들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출발시간과 도착시간 간 차이가 너무 컸으니까. 정말 그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늘 내가 도착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그의 앞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거짓말에 한두 번 속은 게 아닌데도 ‘빨리 오라’고 말할 뿐이었다. 빨리 오라는 말에는 여섯 글자가 익숙하게 따라붙었다. ‘빨리 와. 보고 싶으니까!’ 그 여섯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안심했다. 오늘도 무사히 들통 날 거짓말을 했구나. 거짓말을 제대로 잘 했구나. 뭐 결국에 상대가 더 이상 속아주고 싶지 않아졌을 때 사랑도 끝났지만, 거짓말이 들통 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결국 기꺼이 속아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인 셈인가. 진실, 정직, 신뢰 같은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결국 사랑이니 말이다. 모르는 척 속아 넘어주는 것으로 나를 사랑했던 모든 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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