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은 벅차면서도 어딘가 부담스러운 달이다. 어김없이 나이를 먹고 또 한 해를 버텨야 한다는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2월에 다 털어내지 못한 것들을 매달고서 억지로라도 발을 떼야 하는 달이 1월이다.
3월은 새출발의 달이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면서 계절의 처음인 ‘봄’이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실은 한 해의 포문을 여는 계절은 겨울인데도 우리의 사계절을 분명 봄부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싹이 나고 바람결이 부드러워지는 3월이 ‘진정한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다. 1월엔 억지로 발을 뗐다면 3월, 당신의 발걸음은 조금 더 가볍고 본격적일 것이다. 이쯤되면 시험지나 문서에 날짜를 작성할 때 연도 끄트머리 숫자를 1로 적었다가 황급히 지우고 2로 바꾸는 일이 점차 줄어들 때다. 2가 세 번이나 들어가 도무지 발음하기 어려운 새해를 곧잘 발음하는 때이기도 할 것.
다른 달보다 날짜가 2일~3일 모자란 2월은 실은 가장 넉넉한 달일지 모른다. 1월과 3월 중간에 낀 과도기적 시기인 2월 동안 사람들은 억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새해를 마음에 정착시킬 수 있다. 3월에 시작될 새로운 일들을 대비하고, 본격적으로 펼쳐질 새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때가 2월이다. 이 넉넉한 기운 때문에 2월을 좋아한다.
사실 2월은 내게 조금 더 특별하다. 내 생일이 있기 때문이다. 2월 14일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올해의 나’가 된다. 동시에 2월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비로소 새해를 시작한다. 연말연시에 인사를 주고 받지 못했던 사람들과도 생일을 계기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고,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보게 된다. 미처 꺼내지 못했던 낯뜨겁고 쑥스러운 감정 표현도 생일을 핑계로 늘어놓을 수 있고, 미안했던 마음과 고마웠던 마음도 주섬주섬 풀 수 있다. 사랑한단 말도 보고싶단 말도 이 틈에 전할 수 있다..!
생일 전 날엔 정태, 석주를 만났다. 오래도록 못 보다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은 이들은 그래서 더 자주 보고 싶다. 석주는 약속장소에 조금 더 일찍 도착해 작은 연보라색 꽃잎이 옹기종기 모인 꽃다발을 안겨줬다. 내가 “뭘 이런 걸 준비했어”라고 외치자 석주는 “기분이지!”하고 답했다. 정태는 그 날 점심을 쐈다. 점심값으로 어마어마한(내 기준) 금액이 나왔길래 나눠 내고자 했으나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후! 얘! 이거 얼마나 한다고!”라고 말했는데, 그때 좀 멋있어 보였다. 다음 약속이 있는 석주는 식사 후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정태와 나는 종로 일대를 걷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좀 구경하고, 디즈니 굿즈샵에 들렀다. 들뜬 얼굴로 이것 저것 만져보고 뭘 살까 고르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내가 갖고 싶어하던 것들을 빠른 속도로 집어든 뒤 망설임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그렇게 내겐 토이스토리 포스터, 뱃지, 신데렐라 엽서 등 디즈니 굿즈가 잔뜩 생겼다.
그 날 저녁엔 자영과 만났다. 자영은 그 날 속이 좋지 않았는데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다. 언제나처럼 해사한 그는 언제나처럼 눈이 휘어져라 웃으면서 언제나처럼 내 중대한 고민들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게 했다. 우리의 시간은 훌훌 지나갔고, 자영인 내 마음 속 먼지도 훌훌 털어줬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자영을 생각하면 어째서인지 마음이 뭉클하면서도 애틋한데, 아마도 그녀가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오래 들어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때도 내 무겁고도 축축한 이야기를 훌훌 들어줬던 그가 고맙고 또 고맙다.
생일 당일날엔 송화, 이슬과 축하 파티를 했다. 그 날은 원래 모이지 못할 뻔 했으나 운이 좋았다. 이슬은 일찌감치 내게 새 가방을 사줬다. 지금도 나는 그의 응원과 위로를 언제나 등에 메고 다닌다. 1차로 같이 치킨과 회를 먹고 이제 디저트를 조져야 할 타이밍이길래 나는 자연스럽게 케잌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송화는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더니, “아니야 디저트 있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재빠르게 케잌을 준비하려 했으나 나는 너무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숫자 28에 불을 붙이려다 나와 눈을 마주친 송화는 멋쩍게 웃었다. 이미 내가 취업소식을 전했을 때 케잌을 준비해줬던 두 사람이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고마웠다. 그 둘과 시덥잖은 농담을 하고, 같이 <돈룩업>을 보면서 깔깔거린 뒤에 잠 들었다.
그리고, 대망의 금요일인 오늘! 경진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잠시만요!”라는 말 뒤에 한참 동안 문이 열리지 않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서프라이즈인가?” 아니나다를까 문 너머로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진과 맑은이었다. 하나, 둘, 셋! 하고 문이 열렸다. 캄캄한 집 안에 경진이 케잌을 들고 서 있었다. 옆에선 맑은이 노래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주황빛으로 빛나는 두 사람 얼굴을 또렷이 봤다.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사부작 사부작 준비해서 다 지나버린 내 생일을 기념해준 두 사람, 현관문 앞에서 두 사람의 속닥거림을 들으면서 기다리던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번주가 친구들 덕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