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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Apr 03. 2020

인간이 혐오스러운 인간의 외침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순수(純粹)의 요조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에게 말한다. “과거에 연연하지 마”

사람들은 앞을 걸어가다가도 뒤를 돌아본다. ‘그때 왜 그랬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젖고, ‘되돌리고 싶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씻을 수 없는 과오를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억지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조는 자신의 생을 돌아보다 못해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한다. 요조에게 있어서 성찰이나 반성은 보통 사람들처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보통의 인간은 과거를 미래를 위한 반석으로 삼고,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조는 ‘다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그 자체에 너무나 큰 환멸과 혐오를 느낀 나머지 ‘앞으로 나아가는 생’을 거부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전진하는 삶이 아닌, 죽지 못해 사는, 즉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을 산다.     


미친 듯이 우울하고 어지럽다. 사람의 세계에서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이 뭘까? 도대체 ‘사람’이란 뭘까? - <인간실격>


무엇이 요조로 하여금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아가게 했을까. 요조에게 자신을 투영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무엇이 그토록 사무쳤을까. 요조와 같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캐릭터는 보통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큰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일을 겪는다.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하거나,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누명을 쓰거나, 애인에게 배신당하는 등 성장기의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식이다. 그러나 요조는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어찌 보면 무탈한 인생을 살았다.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 역시 마찬가지다. 집안은 대대로 의원직을 지낸 부호였으며 머리가 좋아 성적도 좋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를 넘어 인간을 혐오하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요조를 보며 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조는 독자에게 있어서 ‘사연 없는 돌연변이’인 셈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간은 사연 있는 사람의 눈에 비쳐질 때만 악한가. 인간관계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보기에만 위선적인가. 요조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볼 수 없는 것까지 볼 수 있었던 것뿐이다. 요조가 인간과 세상을 확대해석하거나 유난스럽게 반응한 것이 아니라, 요조는 볼 수 있는 것을 보았던 것뿐이다. 앞뒤가 다른 하녀들과,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쌓은 아버지와 외조부, 음울함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 이 모든 것을 요조는 본질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았다.  


요조와 보통의 인간과 다른 점은 ‘원래 세상은 이런 거야’라는 말처럼 인간과 삶을 관조적이고 관성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인터넷 상에사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돌아보자. 수면 아래로 묻혀 있던 폭력과 성적 유린이 지금에서야 침묵을 뚫고 폭발하고 있다. 연극계, 언론게, 대학가, 예술계, 종교계까지 수년 전에 자행됐던 사건까지 들춰지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이 자행되던 그 시점에는 왜 피해자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까. 분명 폭력 주변에는 목격자와 방조자, 방관자가 실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닫고 눈을 가렸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원래 남자들이 그래’, ‘원래 이 바닥이 그래’,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


그러나 요조에게는 모든 거짓과 위선이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하게 다가왔고, 요조의 연약한 가슴은 그 모든 것을 처연하게 받아들였다. 새 살이 돋아나기도 전에 상처부터 난 가슴을 안고 요조는 ‘돌연변이’로 살아간다. 봐도 못 본 척,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한 척 살아갔다면 요조는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 중에서 ‘순수’라는 단어가 가장 슬프게 들어맞는 캐릭터는 아마 요조가 아닐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요조에게 생은 힘겨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생은 지속된다. 그것을 스스로 멈추지 않는 이상, 요조는 어찌됐든 자기혐오로 점철된 현재를 살아간다. 요조의 자기혐오는 쓰네코와의 동반자살 실패를 거쳐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로 극에 달한다. 요시코가 강간을 당할 때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극도의 혐오를 느낀 요조는 급기야 외친다. ‘인간실격. 저는 이제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됐습니다’. 뒤이어 요조는 자살시도를 하게 되는데, 실패한다. 살아생전 5번의 자살 시도와 결국엔 자살로 생을 마친 다자이 오사무의 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유작으로 <인간실격>을 남겼고, 그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二十世紀旗手)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마약 투여 혐의로 경찰에게 잡혀갈 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녀의 말처럼 자기파괴는 의사표현의 한 수단이다. 생에 대한 마지막 저항일수도 혹은 마지막 굴복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기파괴는 자기의 몫이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임을 포기하는 선택으로 자살을 택했던 요조처럼, 유서에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적은 후에 입 속에 엽총을 밀어 넣은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처럼. 우리는 모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감히 요조의 자기파괴를 이해한다. 나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했을 다자이 오사무를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실격>은 내가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을 때 집어들 소설이다. 극단의 고통과 불안에 마주할 때, ‘대체 누가 내 생각을 이해할까?’라는 생각에 외로울 때, 요조의 투명한 위로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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