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백의 그림자>
새벽이 성큼 다가온 깜깜한 밤 12시 즈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채로 읽으면 분명 잠이 들 것 같아 억지로라도 의자에 몸을 걸치고선 읽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함께 살고 있는 친구는 건너편 방에서 이미 잠이 든 후였고 불이 꺼진 동네에선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연거푸 방 모서리를 흘끔 거렸다. 어디선가 꾸물꾸물 검고 짙은 그림자가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은교에게도, 무재에게도, 여 씨 아저씨에게도, 고물상 할머니에게도, 무곤 씨에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에게는 ‘그림자’가 보인다.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로부터 그림자가 뜻하던 클리셰(Cliché)에 따라, 또 이 책에서 어딘가 불행한 인물들에게만 나타난다는 설정에 따라,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자는 불행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불행에 잠식될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감까지도 검게 투영한다.
그림자는 <백의 그림자>의 가장 핵심적인 장치다. 황정은은 그림자를 통해 불행의 본질을 꿰뚫는다. 소설 속 그림자들은 모두 몸집을 키운다. 불행이 불행인 것은, 불행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삶에 파장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그림자가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처럼 불행은 족적을 남기고, 또 다른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은교는 커져버린 그림자를 보며 불안해한다. 그림자가 자신보다 커질까 봐 걱정하는 은교처럼 우리도 불행이 삶을 집어삼킬까 봐 걱정한다.
불행이 불행인 것은, 불행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삶에 파장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불안감을 떨쳐낼 용기가 없으면 종국엔 익숙해지기도 한다. 은교는 어느 순간부터 그림자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 대신, 덤덤하게 응시하기 시작한다. 불행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갑작스럽게 떠나는 경우는 드물다. 불행이 삶에 거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불행에 익숙해진다.
그림자는 길어지다가 종국엔 ‘일어선다’. 무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나선 이는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죽음이 실제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재는 곧 자신이기도 한 ‘어린 소년’이 그림자를 따라나섰다가 죽었다고 이야기했으나 소설 속에서 그는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 죽음은 무언가의 상실을 의미한다. 불행이 의식을 지배할 때 일어나는 상실이다. 우리의 의식을 차지하는 것들. 이를 테면 꿈, 의지, 긍정과 같은.
황정은의 세계에서 그림자는 절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제거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의지하던 그 누군가도 내 불행을 없애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코 내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다.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다.’ <백의 그림자>는 분명 잔혹한 진실을 암시하지만 희망을 품고 있다. 황정은은 소년만화에서처럼 희망을 짠하고 등장시키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자연스럽게 그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설계한다. 그녀는 소설의 가장 주요한 메시지를 전반부에 숨겨둔다. ‘숨겨둔다’고 표현한 것은 독자가 처음부터 메시지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의 그림자>는 은교와 무재가 숲에서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둘은 숲에서 세상으로 나온다. 독자는 이 안개같이 뿌연 소설의 전반부에서 독서의 길을 잃는다. ‘숲의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책을 다 덮을 때서야 드러난다.
무재는 은교가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할 때 낡은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다. 은교는 무재의 이야기이지만 무재의 이야기가 아닌 척하는 ‘어린 무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정전으로 방이 깜깜해진 어느 날, 은교는 발을 다친다. 무재의 전화를 받아 든 은교는 처음부터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비로소 ‘무섭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 속에서 둘은 서로의 그림자를 의식하고 응시한다. 물론 쫓아내진 못하지만 그림자가 상대를 잡아먹을까 걱정한다. 그러면서 둘은 어느새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그 이야기의 끝에서, 독자들은 숲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된다. 무재와 은교는 ‘숲’이라는 그림자의 세계에서 헤매다 함께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울창한 숲은 그림자의 세계이며 무재와 은교가 손을 잡고 그 숲에서 걸어 나오는 이야기는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내 그림자도 그토록 위협적인 것일까요?
글쎄요,라고 말하는 무재 씨로부터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걸으며 나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재 씨, 죽는 걸까요, 간단하게.
따라가지 마요.
무재 씨가 문득 나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
소설 속에서 그림자를 쫓아내거나 떼어내려고 시도하는 인물은 없다. 그림자가 더 커질까 봐 걱정하지만 애초에 그 그림자를 ‘내가 어찌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안다. 무재의 점점 커져가는 그림자를 발견한 은교는 속으로 바랄 뿐이다. 숲에서 무재가 은교에게 당부했듯이. 무재 또한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기만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림자를 좇아줄 순 없지만, ‘그림자를 쫓아가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는 것.
조금의 빛도 없는 방 안에서 날카로운 것을 밟아 발에 피가 철철 날 때, 어둠 속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는 것. 그리고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 한참을 걸어도 길을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함께 길을 헤맬 누군가가 있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계속 걸어갈까요’하면, 다시 발을 움직이는 것.
책을 다 덮은 후에 나는 더 이상 방 모서리를 흘끔거리지 않았다. 설령 그림자 같은 게 있어도 “있잖아, 나 소설 하나를 읽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그림자가 내 방에도 있을까 봐 무서워”라고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기에, 괜찮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림자를 견딜 유일한 등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