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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Jul 27. 2020

신림동 적응기

잘 지내보자 비둘기야

2019년 2월 21일에 쓴 글


0.
가장 싼 곳을 고르고, 골랐다. 그러다 보니 내 다음 자취방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정해졌다. 신림동. 각종 이유로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나는 역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을 골랐다. 이왕이면 역에서 가까운 게 좋겠지만 지각병은 역세권에 살지 못해서 생긴 병이 아니라, ‘5분만 더’가 키운 병이니까.

나는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이다. 다만 엄살이 심하다. 새로운 환경이나 변화가 닥쳐올 때면 그 직전까지 온갖 걱정과 앓는 소리를 하다가, 막상 잘 적응해버린다. 엄살떨던 나날들이 민망하고 무색해질 만큼. 낯선 곳에서도 잘 자는 편이고, 천성 자체가 긍정적인 편이라 어느 곳이든 단점보단 장점부터 보인다. 합리화도 아주 잘해서 나중에 단점이 보여도 그에 상응하는 장점을 어떻게든 찾아내 합리화한다.

그래서 신림동으로의 이사도 사실 걱정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거기 좀 지저분하지 않아?”, “거기서 버스로 5분만 가면 영화 <범죄도시>에 나온 대림동이던데.”따위의 걱정을 보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위험하든 더럽든 어쨌거나 미래의 나는 신림동의 생리에 금방 적응할거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그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신변의 위협만큼 위험한 것은 통장의 위협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통장의 위협은 생활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죽이 되 밥이 되 신림동에 정을 붙이고 살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1.
대망의 이삿날이 다가왔다. 가족들이 이삿짐 나르기를 도와주고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끝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채 6평이 되지 않는 방의 풍경이 낯설었다. 원래 살던 집은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운 좋게 당첨된 방 세 개짜리 27평 빌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방은 거대한 테트리스 판 같았다. 마치 블록과 같은 박스들이 내가 서 있을 공간도 없이 방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침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날은 너무 피곤했기에 박스의 바다에서 홀로 둥둥 떠 있는 섬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는 무슨. 잠에 들지 못했다. 억지로 들긴 했는데 새벽 2시에 한 번, 새벽 5시에 또 한 번 깼다. 복도의 소리가 너무나 생경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주인집 내외는 무슨 짐을 그렇게 옮기는지, 또 무슨 대화를 그렇게 크게 하시는지 새벽의 복도는 마치 시장통 같았다. 당연히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다음날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방의 불을 켰을 때 나는 다시 눈을 비벼야 했다.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껐다 켜 봐도, 전구가 다 됐나 싶어서 사다가 갈아 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방은 거의 클럽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전구가 깜빡이는 속도에 맞춰 내 눈도 깜빡여봤다. 그렇게 하면 방의 불이 켜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한 30초가량 그 짓을 하다가 자괴감이 몰려와 관뒀지만 말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아가씨가 잘못 만진 거 아니야~?” 환갑이 넘어 보이시는 주인아저씨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전구처럼 미친 듯이 날뛰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다시 한 번 간곡히 전구를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 더불어 온수 기능을 켜도 따뜻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집 주인님께 말씀드린 지 일주일이 지나도, 클럽모드의 전구는 바뀌지 않았다.


2.
주말에 나는 집근처에 예쁜 카페나 맛집이 있으면 동네가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네탐색에 나섰다. 하지만 집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쓰레기 더미에 모여 있는 비둘기들이었다. “이곳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아닙니다.” 펄럭이는 거대한 플랜카드에도 불구하고, 집근처에는 쓰레기봉투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 있었다. 나돌아 다니는 스티로폼과 각종 패트병들, 그리고 음식물쓰레기까지. 이곳은 비둘기에겐 뷔페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터진 음식물쓰레기봉투에서 쏟아져나온 음식물들과 각종 과자봉지에서 튀어나온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러도 비둘기는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 동네는 비둘기들의 산책로였다. 어떤 골목에는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면, 자꾸만 찾아오니 제발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기도 했다. 어딜 가나 비둘기를 볼 수 있는 곳, 골목 마다 비둘기가 찾아드는 곳, 길고양이보다 길비둘기들이 흔한 곳. 그곳이 바로 우리 동네였다.


3.
나는 집을 고를 때 물론 가격을 우선시했지만 대한민국의 홀로 사는 여성인지라, 안전도 고려했다. 대로변과 5분 거리에 있냐를 따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로변과 채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서, 나는 어정쩡한 뒷모습을 마주쳤다. 술에 잔뜩 취한 채 하수구에 오줌을 싸고 있는 남자였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남자가 굉장히 술에 취해 못 들을 거라고 여긴 나머지, 너무 큰 소리로 신고를 해 버린 것이다. “여기 신림로 94번지 온누리 약국 바로 앞 골목인데요, 어떤 남자분이 노상방뇨를 하고 있어요!!!”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지를 채 올리지도 않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나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내가 왜 뛰지?’싶어서 억울했지만 그냥 뛰었다. 무서웠다. 그러곤 어딘지도 모를 골목에서 20분 이상을 기다리고 돌고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


4.
노상방뇨 남자를 신고하고 얼마 동안은 계속 집을 돌아서 갔다. 빠르고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서 가는 게 불편했지만 그 남자를 다시 마주치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집을 돌아서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로 신림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신림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버스라도 타면 우리 집 근처에서 내리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도착한 버스에 타려 했다. 퇴근시간대에 버스 정류장엔 쓰레기 더미에 몰린 비둘기만큼 사람이 많았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삽시간에 문 주변으로 몰렸다. 질서란 없었다. 누가 먼저 타냐 대결이 열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몰랐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그 순간에 기억났다. 이 버스는 우리 집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진퇴양난이었다. 내 앞뒤에는 이미 버스에 어떻게든 타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몰린 그 압력은 실로 대단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모두 같은 곳을 향해 무질서하게 걸어가는 행렬에서 이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가 빠져나가려고 움직이면 뒤쪽에서 “아씨 뭐야”는 말이 들려왔다. 내가 빠져나가려는 사람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비켜줄 생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이 버스가 우리집 근처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내 안일함 때문인데도 나는 문득 안간힘을 쓰는 이 순간이 서러워졌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따뜻해질 줄 모르는 물의 온도와, 도저히 깜빡임을 멈출 줄 모르는 전등과, 도무지 치워질 줄 모르는 쓰레기더미들과, 그곳에 몰려 있는 비둘기들과, 바지춤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이 밀려오자 나는 빠져나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버스에 타려는 사람들의 행렬에 실려 그 버스에 그냥 타 버렸다.


5.
행선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에서 몇 정거장 쯤 지나쳤다. 나는 그 시간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데 쓰려 했다. 오늘 아르바이트가 너무 힘들어서, 저녁밥을 못 먹어서 내가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슬픔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버스 손잡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도 정말 나는 쉽게 우는 인간이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아빠집이든 예전에 살던 자양동집이든 어느 곳이든 좋았다. 하지만 신림동은 아니었다.


6.
이대론 안됐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곳을 어떻게든 사랑하고 싶었다.

다음날 나는 동네 할인마트로 향했다. “아저씨, 박카스 한 박스만 주세요.” 박카스 박스 위에 포스트잇도 써 붙였다. 새로 이사 온 301호 아가씨인데,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 저희 집 온수와 전등도 잘 부탁드린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새벽에 복도에서는 조금만 조용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도 최대한 애교 섞인 투로 덧붙였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 있어서 박카스 한 박스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좀 잘 좀 부탁드린다는, 그런 의미다. 박카스를 전해드린 이후로는 나는 더 이상 집에 왔는데 클럽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게 됐다.

뱀이나 쥐보다도 비둘기를 혐오하던 나는 신림동에서 비둘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인정하기로 했다. 어쩌면 동네 주민 수보다도 많을 그들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비둘기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출근길마다 애써 비둘기를 쫓아내려 하지 않고 그들과 자연스레 함께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거나 날아올라도 이젠 호들갑을 떨며 놀라지 않기로 했다. 어떨 때는 그들과 나란히 걸어갈 때도 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비둘기들에게만큼은, 이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집으로 갈 때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노상방뇨 남자를 마주칠까 두려워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한 인간이 잘못한 거지 그 인간을 신고한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핸드폰 메모 어플에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의 번호를 정리했다. 152, 5528, 5528A, 5516, 관악08, 5519는 가고 5530과 5514는 가지 않는다. 아직 다 외우진 못했지만 차차 익숙해질 거라 생각한다.


7.
이사온 지 3주차, 이제 신림동의 장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물가가 미친 듯이 싸다. 한 끼 식사를 7000원 안쪽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널리고 널렸다. 가난한 자취생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마카롱 맛집도 발견했고, 신림역 주변에 물가가 30년 전에 멈춰 있는 엄청난 빵집도 발견했다. 요즘 소확행이 이 빵집에서 빵을 한아름 사들고 집에 돌아가 종류별로 먹어보는 것이다. 자취생이 많이 사는 동네인 만큼 셀프 빨래방, 목욕탕, 수선집 등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집에서 5분 거리엔 도림천도 있다. 청계천 비스무리 한 산책로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자주 걸을 것 같다.

사실 신림동이 싫었던 이유는 거리에 나랑 비슷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표류하는 이들. 가방을 매고 독서실을 전전하는 이들. 가난한 청춘을 살아내는 이들.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이곳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결국 신림동을 사랑하는 일은 나의 현실을 인정하고 감내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젊지만 누추한 이 신림동의 골목에서 사소한 장점을 찾아내며 살아가면서, 나의 청춘도 조금씩 사랑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 누추한 삶의 거리를 사랑할 수 있기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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