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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Jul 28. 2020

할머니의 개학

인생의 방학은 언제 오나


  밥그릇에 붙은 고춧가루가 평화를 깼다. 할머니는 설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직접 음식을 차렸다. 그 날도 모두가 상에 둘러 앉아 막 밥 한 술을 뜨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만 작은아빠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하얀 밥그릇에 붙은 작고 빨간 고춧가루 한 톨이.


“엄마, 설거지 좀 꼼꼼하게 해 달라니까. 난 지은이가 이렇게 지저분한 식기에 밥 먹는 거 너무 싫어요. 애 물통에서도 자꾸 고춧가루 나와서 친구들이 놀렸다잖아.”


  밥상을 둘러싼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할머니는 얼버무렸다.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눈이 침침해서…” 하지만 고춧가로 한 톨에서 출발한 작은 아빠의 불평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몇 분간 할머니를 향한 작은 아빠의 지적이 이어졌다.


  설이 왔다는 것은 곧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지은이의 개학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난 몇 년 간 손녀의 개학이 찾아온 할머니의 삶은 분주했다. 할머니가 이혼한 작은 아빠 대신 손녀 지은을 맡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금요일이면 베란다에서 실내화를 잘 빨아 주말 새에 볕에 말렸다. 지은이가 하교하면 책가방을 뒤져 알림장과 각종 가정통신문을 확인했다. 저녁이면 손녀가 준비물을 빼먹진 않았나, 숙제를 잊진 않았나 챙기고 학원 차가 픽업하는 시간을 기억해뒀다가 같이 손녀 손을 잡고 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몸과 머리가 기민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할머니는 매달 학교에서 나눠주는 식단표를 보고 아토피가 심한 손녀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체크해서 일러주는 것을 종종 잊었다. 귀가한 손녀의 얼굴이 군데군데 빨갛게 피어오른 것을 볼 때 마다 할머니는 속이 빨갛게 짓무른다고 했다. 피죤을 넣는 것은 꼭 빨래를 다 돌리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지은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저 옷에서만 쾌쾌한 냄새 난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말없는 세탁기 앞에서 주먹으로 자기 머릴 치며 후회를 쌓았다. 지난 가을에는 소풍을 잊었다. 유부초밥 재료며 과일이며 재료를 가득 사다놓았건만 다음 날 아침에 깜빡 잊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친구들의 도시락을 조금씩 얻어먹었다고 했다. 그 날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속상함에 훌쩍였다.

“할미를 잘못 만나서 도시락을 못 싸갔어. 애가.”       


  명절 상 위에는 각종 해산물과 생선구이가 꼭 올랐다. 아무리 음식을 간소화하자고 해도 할머니는 생선과 해산물 요리를 고집했다. “느이 아빠랑 작은 애가 고기를 안 먹잖니.” 할머니의 아들들이 돼지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자마자 폐결핵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던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는 작은 돼지국밥집을 차려 생계를 유지했다. 아들들은 자라서도 마당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죽어가던 돼지를 기억했다. 집안 곳곳에 스며든 돼지 누린내를 잊지 못했다. 아들들에게 돼지고기 냄새는 비릿한 가난의 냄새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돼지 누린내 나는 손으로 국밥을 팔아 아들들을 키워냈다. 그 손으로 수없이 도시락을 싸고, 실내화를 빨고, 교복을 다리면서. 그리고 지금은 그 손으로 아들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     


  지은이의 개학이 다가오면 할머니의 삶은 분주해진다. “학교 보내는 건 니 아빠 대학원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괜찮으시냐고 묻고 싶어서 주위를 맴도는 나에게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웃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개학을 돌보느라 할머니의 방학은 너무 짧았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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