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1천 5백 자의 대서사시를 일주일에 거쳐 쓰는 대장정을 마쳤다.
<코스모스> 집필을 마친 칼 세이건의 기분이 이랬을까? 성경에서 가장 길다는 시편을 다 읊은 다윗의 심정이 이랬을까? 누가 들으면 대단한 책 한 권이라도 써낸 줄 알겠지만 졸.라 아니다. 한 매체의 극악무도한 공채에 응시했을 뿐이다.
일주일 간 개고생을 했다. 일단 나는 자소서 쪼렙이라 나를 마주보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평소에 우리를 '대충' 안 채로 살아간다. 빨래하기 전 옷을 대하듯 자기 자신을 거꾸로 뒤집어 털고, 그 속에 혹시 뭐가 들어 있나 뒤져보지 않는다. 나를 '대충' 알고 사는 평소대로 자소서를 써 내니 매번 탈락했다. 너무 오래돼 먼지가 쌓인 기억을 꺼내서 후후 먼지를 털어낸 다음 쓰다듬어도 봐야 하고, 더 오래된 건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에 방전된 방에서 양초를 찾듯 시간을 더듬어야 한다. 선명히 기억나더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떠오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던 기억은 이를 악 깨물고 마주쳐야 한다.
그 다음 단계 준비물은 항마력이다. 그렇게 찾아낸 '나'의 조각을 이어붙여서 그럴 듯하게 포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뽑아주면 잘할 수 있어요!", "저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랍니다~"라는 말을 너무 오만해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자소서를 쓸 때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이뤄낸 것들이 가장 애틋해야 한다. 그 순간이 안 오그라드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이번에 내가 응시한 매체는 '1분 자기소개 영상'을 제출해서 내라고 요구했다. 그 영상을 촬영하는 과정은...정말..항마력이 필요했다..
일주일 간 나는 거의 매일 같은 카페에 같은 자리에 있었다. 커피가 맛있고, 적당히 비싸고, 적당히 조용한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자리에서 참 많은 일을 했다. 10대 때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훑고, 내 경험을 톺아보고, 그 과정에서 이룬 나름의 성과와 성장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스토리를 부여해 구구절절 늘어놨다. 지난했다. "입사지원서 접수가 완료됐습니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메세지를 보는 순간, 오래도록 미뤄 온 빨래를 끝낸 듯 마음이 깨끗했다.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간 방치돼 있던 방을 청소했다.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내가 지겨웠다. 너무 오래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나를 잠시 벗어두고 타인의 세계에 골몰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빗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