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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Sep 21. 2020

도망의 역사

라고 쓰고 '모방 실패기'라고 읽는다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보다 어릴 때였다.


인생의 문제가 생기면 나는 주로 나로부터 도망쳤다. 달리 표현하자면, 남에게서 답을 찾았다. 그때마다 나보다 똑똑해서 동경했던 애인에게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당당해보이는 친구에게로,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가득한 선배에게로 찾아갔다. 그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나를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에게는 없고 그들에겐 충만해 보이는 것들을 움켜쥐려 애쓰면서 나는 나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추임새까지 따라 적는 모범생처럼 성실하게 애썼다. 아이러니한 순간도 있었다. 누군가 "이럴 때일수록 너의 세계를 찾아야 해."라던가 "너 자신을 알아가려고 해봐"라고 조언해줄 땐 그 태도마저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만의 세계를 쌓는 것'조차 남에게서 배우려 하는 모순을 범하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성실한 학생의 노력은 늘 배신하지않듯이 그 과정에서 분명히 성장한 면도 있다. 조언이나 지적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뼈 아프게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문제는 매우 다양했으므로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얻은 답도 매우 다양했다. 그 다양한 답을 알아가고 삶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꺼끌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종종 깨달았다. 이 불편함은 나로부터 도망친 대가라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막연했을뿐더러 내가 그 깨달음에서조차 도망쳤기 때문에 금세 잊혔다.


  인생은 '나로부터의 도망'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 잔인하게 가르쳤다. 인생의 오래된 수업 방식은 이별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동경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답을 구하며 의존했던 애인이 떠나자 나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지나친 동경의 또 다른 부작용은 상대 역시 인긴인지라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잊는 것이었다. 상대의 가치관과 해답을 무리하게 나에게 이식하려 하면서 나는 괴로움에 빠졌다. 그 해답이 모든 상황에 들어맞지도 않고, 또 나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문제였던 것은 상대가 상처를 줄 때 나를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언의 단점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자주 상대에게 조언을 구했다. 반복되는 물음에 지친 상대가 때때로 신중하지 못한 조언을 할 때, 즉 나에게 상처를 줄 때 무방비로 노출됐다. 조언과 상처주는 말을 구분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 받은 상처를 깨달은 나는 친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는 틀렸고, 상대는 맞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참담한 이별이었다.


  너무 뒤늦게,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속 절규를 이해했다.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절규였다. 여러 이별이 남긴 여파 속에서 나는 '질투가 힘'이던 계절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서 매번 무언가를 훔치려 애썼으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훔치지 못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나의 세계가 있어야 타인의 세계와도 건강하게 교감할 수 있단 사실이었다.


  물론 '나의 세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무수한 과거를 누적해 온 입체적인 인간이었으니까. 다만 내가 느끼기에 그 세계가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게 문제였다. 인생에게 잔인한 수업을 받은 후 나는 남에게로 도망치는 일에게서 도망치려 애썼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지금 적을 수 없다. 내가 잘 도망쳤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내 도망의 역사 중 한 페이지가 마무리됐다는 것을 느낀 순간은 있다. 내 자신이 남에게로 도망치는 것의 한계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이다. 최근 종종 나에게서 답을 찾고 싶어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으로 채우려는 사람을 본다. 그 얼굴엔 조급함과 열등감이 성실함, 의욕과 함께 뒤섞여 있다. 나 역시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내내 그 얼굴로 살았으므로 매우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아무리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는 게 있을텐데."


  사람에겐 아무리 훔치려 해도 훔칠 수 없고,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고, 복사하려 해도 복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자기 세계에 골몰하는 시간이 쌓은 무언가다. 무수한 도망의 역사 속에서 내가 얻은 진리다.


  요즘은 주로 나에게로 도망친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혼자서 끌어안는다. 그러다가도 답이 안나면 가끔 누군가에게 "너라면 어떡할거야?"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들이 해준 모든 말을 무리하게 끼워맞추려 하지 않는다. 혼자 골몰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은 건 사실이다. 외로우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조차 나의 일부라는 것을, 내가 쌓는 '나'가 될 것을 안다.








(시험 망치고 새벽 감성으로 글 쓴 거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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