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야. 오랜만이야. 아주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 매년 너의 생일 쯤엔 네가 있는 곳에 가서 편지 한 통은 전해주겠다는 약속이 무색하게 말이야.
S야. 몇달 전에 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래서 정해진 기간 안에 추억을 따로 저장해둬야 한다고 했어.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싸이월드에 접속하지 않았어. 기간이 넉넉하니 나중에 기억해내서 저장하면 되겠지, 하고 게으름을 부렸어. 다행히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오늘 싸이월드에 남아 있는 너의 기록들을 찾으러 갔었어.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에 직면했어. 싸이월드는 더이상 네이트 아이디와 연동되지 않는 모양이야. 늘 네이트 아이디로 싸이월드에 접속했던 나는 싸이월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억해낼 수 없었어. 열심히, '아이디 찾기'를 지나 '비밀번호 찾기'에 도달했는데 나를 인증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어. 당시 사용했던 휴대폰 번호는 이미 다른 번호로 바뀐지 오래였고, 내 네이버 아이디는 싸이월드 측의 설명에 따르면 이제 '사용 권한이' 없대.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동이 트면 싸이월드 고객센터 측에 문의를 하는 방법 뿐이야.
결국 게을러서 너와의 추억을 다 잃게 된 셈이야. 우리가 같이 썼던 다이어리, 서로의 홈페이지에 남긴 일촌평과 댓글, 그리고 방명록들, 몇 장 안되는 너의 사진까지, 전부 다 말이야. 당시 네가 어떤 말투를 자주 썼는지, 시험기간에 공부하기 싫다는 나의 말에 네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별명을 붙였었는지, 이제 나는 알 수 없게 됐어.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나는 흐릿하거든. 내 머릿 속에 저장돼 있지 않아서 나는 종종 싸이월드에 박제된 기록물에서 너를 기억하곤 했어.
내가 게을렀던 이유는 결국 너를 잊어갔기 때문이야. 나는 너와의 추억이 절박하지 않았어. 몇 주에 한 번씩 꾸던 네 꿈이, 몇 달에 한 번으로 줄고, 몇 년에 한 번으로 줄더니 이젠 더 이상 꾸지 않게 됐어. 날이 추워지고, 너의 생일이 다가와도 울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됐어. 네가 있는 산에 아직도 새가 찾는지, 풀은 얼마나 돋아났는지, 아직도 바다가 선명히 잘 보이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S야. 너를 떠올린 건 네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야. 최근 나는 사람들한테 아주 많이 지쳤거든. 네가 떠나기 전날 밤, 나는 고민했었어. 너에게 메세지를 보낼 때 '잘자'란 말에 '사랑해'란 말을 붙일지 말지를 말이야. 그런데 우린 사실 그런 말을 자주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었잖아. 서로 장난이 심하고 놀리느라 교실을 우당탕탕 뛰어 다녀서 학급회의 때 "S와 B의 장난이 너무 심하다"는 게 안건으로 올라왔을 정도잖아. 그래서 그 말을 하지 않았어. 사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는데 말이야. 다음 날 당연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빠른 시일이 아니더라도 그 말을 너에게 할 기회가 앞으로 넘쳐난다고 나혼자 멋대로 생각했었어.
나는 그때 너에게 '잘자'란 말만 한 게 너무 후회됐어. 그래서 사람들에겐 '잘자'란 말과 그 이상의 말을 자주, 먼저 하는 쪽이었어. 말을 먼저 건네고, 애정을 먼저 표현하는 게 늘 내 쪽이어도 괜찮았어. 그런데 요즘엔 그렇지가 않아.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데 나 혼자 열심히 애쓰고 있단 생각에 지친 모양이야. 그래서 네가 많이 생각났어. 늘 '투 머치'한 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던 게 너였잖아. 너는 내가 언제 찾아가도 나와주고, 무엇을 언제 이야기하든 들어줬었어.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먼저 애정을 표현하지 않던 네가 유난히 나는 좋아했어.
나는 네가 필요해져서, 너를 떠올렸어. 내가 누군가에게 특별했던 기억이 필요해서 너의 기억을 꺼냈어. 내가 힘들지 않았다면, 외롭지 않았다면 너를 떠올리지 않았을거야.
S야. 슬픔 조차 성실하지 못해서 미안해. 1년에 단 하루조차 시간을 내서 새우깡 한 봉지 갖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싸이월드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에 그냥 잠들어버려서 미안해. 그 이후로 많은 나날을 그렇게 흘러 보내서 미안해. 명함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님, 어머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해. 그 날 '잘 자'란 말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S야. 2012년 여름 어느 날에 내가 너네 동네에 불쑥 찾아갔던 때가 기억이 나. 바다가 보이고 배가 다니는 항구가 있고 횟집이 즐비한 그 동네 말이야. 해안도로를 쭉 따라 걸으면 정수리가 뜨거워지지만 바다를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그 동네 말이야. 항구 어귀에 들어서면 짠내랑 함께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그 동네. 무엇 때문에 너를 찾아갔는진 기억이 안나. 아마 답답해서 너를 찾아갔을 거야. 토요일이었을까? 방학이었을까? 너는 한달음에 내게 와줬고 나는 atm기기에서 돈을 찾았어. 밖이 뜨거워서 atm기기가 있는 곳이 시원할 줄 알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더워서 우리 둘 다 웃었던 기억이 나. 내가 찾은 돈으로 빠삐코 하나씩 물고 해안도로를 쭉 걸었었지.
그때 내가 입은 옷이랑 내가 맨 가방이랑 평소처럼 허술하게 하나로 대충 묶은 네 머리랑 휘적거리는 네 걸음거리는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안 나. 나는 그 날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한껏 따뜻해진 마음으로 집에 갔던 게 기억이 나는데, 네가 어떤 말을 해줬는진 기억이 안 나. S야.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말을 기억해낼 수 없겠지. 나는 이토록 게으르니 말이야. 나는 정말, 이젠 더이상 구체적으로 슬플 수 없겠지. S야.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서야 깊은 슬픔이 몰려 와.
S야. 많이 보고싶다. 이번 겨울엔 따뜻하게 입고서 한 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