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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Oct 18. 2020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

허무를 압도하는 것, 어쩌면 애틋함

  "우주의 거대함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지 깨달은 학자들은 종종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어요."


  학생 기자 시절 물리학 교수를 인터뷰하던 중 들은 말이다. 그때 마주친 학자의 안경 너머 굳은 동공이 유난히 크고 깊어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그날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존재의 허무함이 얼마나 섬뜩한지 간접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고작 스물 둘이었기 때문이다. 스물 언저리의 청년들이 허무함을 감각으로 느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도 청춘이란 말이 유효하다면, 청춘의 축복은 허무함에 압도될 확률이 적다는 것일 게다.


  그때를 기억한 나는 허무함을 이용하는 꾀를 부려 봤다. 내게 큰 위기가 닥쳤다고 느꼈던 때다. 내가 겪는 불행이 조금이라도 작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우주 다큐멘터리를 봤다. 행성이 내뿜는 불꽃과 가스가 얼마나 큰지 열심히 설명하는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달 대신 목성이 지구의 위성이었다면 지구가 어떤 처지가 됐을지도 봤다. 파괴와 죽음 그리고 탄생이 아무렇지 않게 초 단위로 반복되는 것이 '생'인 행성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화면을 열심히 눈으로 쫓았다. 지구의 몇 천배쯤 되는 크기의 행성을 지구의 몇 억배쯤 되는 블랙홀이 삼키는 광대한 상황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우주의 크기는 광대하단 말로도 설명이 불가한 것 같았다. 그 속의 내가 얼마나 작은지도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겪는 일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도움이 되긴 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면 나는 "아 허무하도다"하며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때가 무색하게 요즘의 나는 종종 허무에 압도된다. 매일같이 지구를 도는 달처럼 내가 이대로 영원히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삶이 있다. 지원-탈락의 무한궤도다. 합격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우울한 취준생의 시기가 길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지금의 꿈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니고 싶지 않은 기업에서 하면서 그다지 살고 싶지 않은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합격을 한다고 해도 허무함은 남는다. 삶이 너무 쉽게 예상되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어느 정도의 사회적 위치가 정해진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삶의 궤도,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될까 하는 허무함을 느낀다. 노력해서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나는 가난한 취준생에서 가난한 직장인이 될 뿐이다.

 

  인정한다. 아무래도 청춘의 효력이 다한 것 같다. 마음이 늙어버렸다. 아직 내 얼굴에 책임질 나이까진 아니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흠칫 흠칫 놀란다. 얼굴도 함께 늙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눈동자가 황망해진다. 얼굴엔 외로움이 덕지 덕지 묻어 있다. 입꼬리는 내려가고 눈꺼풀은 무겁게 가라 앉았다.  


  그러던 와중에 언론고시생이 모인 카페에서 한 글을 봤다. <언시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언론인이 된 한 카페 이용자가 후배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발골을 잘했다. (1) 논술 준비하는 만큼 기사는 쓰니? (나: 아니오..) (4) 통계랑 그래프랑 친하니? (나: 아니오..) 그가 나열한 문장 하나에 내 뼈도 하나씩 사라졌다. 특히 마지막 항목이 압권이었다. "(7) 장수생이여. 더 많이 웃어라."


  "면접관들 기가 막히게 장수생 알아봅니다. 가슴 아픈 소리지만 우울하고 지쳐 보이면 장수생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곳은 정확히 그 이유로 뽑지 않기도 합니다. 기업 입장에서 신입에게 바라는 티피컬한(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파이팅 넘치고, 어설프지만 정의감 넘치는 스테레오 타입이요. 연기하세요. 면접 볼때만이라도 기운 넘치고 자신감 넘치고 행복한 사람처럼."


  이 글에 공감한다. 생각'마저' 가난한 청춘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채용 시장에선 더 그렇다. 주머니가 가난한 건 괜찮다. 그러나 용기가 가난해선 안 된다. 가진 게 없다는 걸 티내는 건 괜찮아도, 앞으로도 가질 게 없다고 생각한다는 게 티나면 큰일난다. 내년이면 나도 언시 2년 차, 장수생이 된다. 사실 지금도 생각은 장수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위기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허무가 지속되니 열정이 생기질 않았다. 열정이 없으니 당연히 성장도 멈춰 있었다. 성장하지 않으니 노력할 동기부여도 사라졌다. 허무의 악순환이었다.


  주섬주섬 넷플릭스에 들어가 다시 우주 다큐멘터리를 켰다.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학보사 기자 시절에 만난 물리학 교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교수님은 그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가 답했다.

  "저도 많이 허무했어요. 제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달으니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마저도 의미없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들이 한없이 작은 존재란 걸 인지하고, 자신보다 셀 수 없이 큰 우주를 알고자 하는 존재는 아직 인간밖에 없다고요. 보이저 1호 안에서 우주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고 돌아가면서도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이는 지구를 포착한 칼 세이건처럼요."


<창백한 푸른점>, 칼 세이건이 순간적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세이건은,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애틋해할 줄 안다. 합리화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합리화가 사라지면 아마 지구의 절반 이상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실제로 선배 N은 마치 명언처럼 이 말을 하곤 했다. "인간은 합리화 안 하면 자살하는 동물이야."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면서도 과거를 돌아본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것을 이뤄왔는지, 그때 함께한 이는 누구였는지, 그때 나는 어땠는지 등을 톺아본다. 내가 살아온 삶이 가끔 눈물겹게 애틋하고 자랑스러워서 우리는 묵묵히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다.  


  애틋해하기 위해 우주 다큐멘터리를 본다. 우주에 비하면 모래알보다 못한 인간이 우주를 알기 위해 어떻게 매달려왔는지 실감하기 위해. 작고, 또 작고, 작은 인간이 얼마나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지. 무수한 실패를 딛고 얼마나 작은 성과를 이루고 있는지. 이런 시선으로 다큐멘터리를 보면 어딘가 벅차오른다.


  삶의 허무를 압도하는 건 어쩌면 자기를 향한 애틋함이다.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향한 인간의 역사에 감복하면서 허무를 이겨내듯이. 늙어버린 얼굴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자기소개서의 빈칸 앞에서 무너지려할  허겁지겁 과거를 더듬는다. 내가 이룬 미약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매만져본다. 그러고 나면 다시 허무하고 무모한 행복을 좇을 힘이 생긴다. '지금의 나' 역시 '미래의 나'가 애틋해할 얼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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