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롬 Feb 28. 2021

올랭피아에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경험이 있어. 요즘엔 잊고 살다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네의 그림을 보고 떠올랐지 뭐야. 그 경험은 몇 년 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신상이 털렸을 때의 일이야. 그때 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어떤 포르노 배우가 나라는 주장이 담긴 글이 올라왔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화면 속 여자는 옷을 벗고 몸을 보이고 있었어. 누가 봐도 일반인인 내가 누가 봐도 연출된 그 사진을 찍었을 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나라고 믿고 싶어 했어.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지인 능욕방’이 나오고 정확히 알게 됐어. 내가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      

  최근에 디지털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얼굴을 이용한 성범죄가 많이 일어났잖아. 당사자 동의 없이 SNS에서 얻은 얼굴 사진과 포르노를 합성하는 딥페이크가 대표적이지. 앞에서 말한 ‘지인 능욕방’은 메신저 채팅방에 모여서 주변인 사진을 다른 사진의 몸과 합성해 유포하는 방이래. 가해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여성을 타락시키고 싶어 해. 더욱 실제와 비슷할수록 높은 퀄리티로 치고, 더 가학적일수록 열광하지. 


      

마네, <올랭피아>, 1863.


  사실 마네의 그림인 <올랭피아>의 경우는 이 반대야. 그림 속 올랭피아는 나체로 길게 누워있어. 마네가 <올랭피아>를 내놨을 때 사람들이 혹평을 쏟아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림 속 올랭피아가 실제 있을 법한 사람이기 때문이래. 실제와 유사할수록 열광하는 디지털 성범죄와는 반대인 거지. 그때만 해도 여성의 누드화는 오로지 신화나 역사 속에서 재현돼야 용인됐거든. 그리스 신화 속 비너스의 정형화된 아름다움에서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느꼈어. 즉, 여성의 벗은 몸은 숭고해야만 그림에 담길 수 있던 거야.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그리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올랭피아의 몸이 외설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 당시 그림 속 올랭피아의 ‘똥배’를 비웃는 시선도 있었대.      


  많은 사람들은 마네가 <올랭피아>를 상류층 남성의 위선을 꼬집기 위해 그렸다고 해석해. 실제로 <올랭피아>는 오르비노라는 화가가 그린 <비너스>와 구도가 아주 유사했어. 마네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에 대해 비판하고자 이 그림을 그렸다는 추측이 나올 법 하지. 마네가 이 그림을 그렸던 시기는 상류층 남성을 주 고객으로 삼는 성 판매업이 성행했던 때야. 올랭피아 옆엔 하녀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데, 그 꽃다발을 보낸 이 역시 쉽게 추측할 수 있지. 부끄러움이나 유혹의 기운 없이, 태연하게 관객을 응시하는 올랭피아의 눈이 누군가는 아주 불편했을 거야. 올랭피아는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현실에 ‘있을 법한’ 존재였거든.      


  그림을 보다가 나는 문득 150년 전 한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휩싸였어. <올랭피아> 속 모델은 마네의 의도를 알고 모델링에 응했을까? 또 그는 <올랭피아>가 유명해지면서 불행해지진 않았을까? 그림으로 인해 얼굴이 알려진 올랭피아의 삶이 무사했기를 바랐어. 


  딥페이크와 ‘지인 능욕방’의 지금, 그리고 <올랭피아>의 시대. 이 둘은 분명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여성의 몸이 여성이 아닌 다른 존재의 시선에 좌우된다는 거야. 방식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누가 주로 바라보느냐는 늘 같았지. 우리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숭고해지지도, 타락하지도 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오로지 나만의 시선으로 내 몸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사실 이 질문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긴 글을 쓴 건지도 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