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은 파열음이다. 철로 된 야구방망이가 공에 맞았을 때처럼 고체와 고체가 만나 내는 소리다. 만약 야구방망이를 천이 감싸고 있거나 푹신한 쿠션이 덧대져 있다면 ‘깡’ 소리는 나지 않는다. ‘깡’ 소리가 맨 야구방망이에 공이 부딪혀 나는 소리인 것처럼 깡 역시 맨몸으로 승부에 뛰어드는 사람이 갖추는 자세다. 쩐도 빽도 없는 이들, 즉 약체가 강자에게 덤빌 때 우리는 ‘악으로 깡으로 덤빈다’고 표현한다. 깡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작은 반란이자 벼랑 끝에 몰린 약체의 최후의 일격이며 조소받는 이들의 판 뒤집기를 위한 자기암시다.
그러나 비의 ‘깡’은 리스너들의 마음에 파열음을 내지 못했다. 시대착오적인 컨셉, 유행지난 춤 동작, 괴상한 옷차림 등의 여러 원인 뒤에는 비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가 전혀 ‘깡 감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본원인이 있다. 비는 약체가 아니다. 깡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 기인하지만 비의 자신감엔 근거가 넘쳐난다. 쩐은 말할 것도 없고 빽은 필요하지도 않다. 본인의 존재가 곧 빽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깡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깡을 외쳐대니 대중의 입장에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본래 ‘깡’의 파열음은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를 질렀다. 소년만화 속 주인공들은 늘 능력은 부족하지만 깡이 넘친다. 아무것도 없는 주인공이 깡으로 승리했을 대 독자들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 <깡철이>, 드라마 <쌈마이웨이> 등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콘텐츠에서 역시 가진 건 깡뿐인 청년이 등장한다. 이런 콘텐츠에서 깡은 맨몸의 청년들이 갖춰야 할 속성으로 주로 다뤄졌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에게 있어서 깡은 언어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낡은 개념이 됐다. 깡은 2000년대 초·중반에 유행하던 단어다. 비의 ‘깡’이 있기 전에 청년들은 깡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깡의 자리를 대체한 건 ‘존버 정신’이다. 이제 청년들은 깡의 ‘뒤집기’보다는 ‘버티기’를 택한다.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보단 그저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게 중요하다. ‘깡’의 자리를 대체한 ‘존버’는 좀 더 무력해진 청년 세대를 대변한다. 계층이동의 가능성은 점점 더 닫히고, 고용위기는 날로 심해지며, 평생을 벌어도 집 한 채를 못 살만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청년에게 불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청년은 ‘깡’을 부릴 열정도 포기했다.
비의 ‘깡’이 지속적으로 조소받는 이유는 비가 ‘깡’이 아니면 조소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깡’은 대성공한 가수인 ‘비’를 조소할 수 있는 근거다. 청년들은 이제 깡으로 세상에 대항하는 이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니라 깡과 어울리지 않는 강자를 조소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비의 ‘깡’에 각종 훈수를 두거나 ‘우울증치료제’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깡 한창 유행할 때 썼던 글, 지금은 어마어마한 뒷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