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선의 <뚜리빼> 추천글
(예전에 써둔 글)
낙관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시대를 지나왔다. 성격은 긍정적일수록 좋고, 삶에 대한 자세는 낙관적이어야 하고, 특히 ‘나’에 대한 긍정이 바탕이 된 인간이 누구에게든 좋은 평가를 받는다. ‘웃음은 눈물로 닦아야’ 하고, 비관은 낙관으로 향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응당하다. 오죽하면 지난 세대가 소비했던 캐릭터의 스테디셀러는 ‘캔디’다. 캔디형으로 대표되는 캐릭터들의 특징은 세 가지다. 역경을 겪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이고, 종국엔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그동안 수많은 캔디가 있어왔고 그들은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지금도 캔디는 어디선가 사랑받고 있지만 청춘들은 더 이상 캔디처럼 살 수는 없다는 데 모두들 동의하는 눈치다. 그들은 캔디의 낙관에 지쳐버려 낙관 대신 쿨병에 걸리는 쪽을 택했다. 청춘들은 이제 삶은 캔디처럼 극복해내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달관하고 관조해버린다. "인생 원래부터 이랬는데 뭘 어쩌라구." 쿨병으로 대표되는 청춘의 자세는 세계에 대한 순응보다는 냉소에 가깝다. 능동보다는 수동에 가까우며 감정의 분출보다는 억누름에 가깝다. 쿨병의 가장 두드러지는 증세는 무심함으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이다. 요즘의 청춘들의 세계에선 무심할수록 사랑받는다. 반대로 지나친 관심은 환영받지 못한다. 사회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진지충’이 되고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설명은 ‘TMI’가 된다. 남의 삶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오지라퍼’ 중에 나이가 조금 많은 이들은 금세 ‘꼰대’가 된다. 이런 세계에서는 지나친 관심뿐만 아니라 지나친 감정 역시 사랑받기 힘들다.
지나친 감성을 빼면 시체인 나는 이 쿨병 가득한 세계에서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도 캔디는 싫다. 더 이상 '노오오력'을 믿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 대한 내 모든 생각마저 체념하고 싶진 않다. 살다가 가끔 인생을 거지같다고 말하고 싶고 혹은 인생을 개같다고 말하는 사람이랑 얘기를 나누고 싶다.
낙관적이지 않지만 세상에 질려버렸다고 해서 비관까지 숨기지 않는 캐릭터가 필요했다. 모든 감정의 볼륨을 낮추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을 가장 크게 울려대고 있는 비관의 볼륨만 키어놓은 캐릭터가 있었으면 했다. 그래, 그냥 나 같은 캐릭터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때 만난 게 바로 ‘잇선’의 뚜리빼였다.
뚜리빼는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쿨하지도 않은 비관쟁이다. 뚜리빼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좋았다. 처음부터 그냥 ‘삶은 싸가지가 없어!’라고 단언해버린다. 뚜리빼는 알바를 하느라 건강을 잃어버려서 알바를 그만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알바를 그만두니 이번엔 돈을 잃는다. 핸드폰 요금을 밀렸다는 전화소리에 잠이 깬 뚜리빼는 외친다. ‘건강 쉬발롬! 돈 개새끼!’. 또 세간의 베스트셀러인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를 보고서는 “꿀만 빠는 새끼가 뭘 안다고 지껄여!”라고 시원하게 일갈한다.
이 만화의 주제는 비관이며 결말도 비관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비극’이 아니라 비관이라는 점이다. 뚜리빼의 이야기는 결말이 해피엔딩일 수 있어도 뚜리빼가 비관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
비관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비로소 비관을 낙관할 때 우리는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용기가 생기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어떤 순간에는 주먹을 꽉 쥐고 버티는 게 아니라, 주먹을 풀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울고 싶을 때, 나는 뚜리빼를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