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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들의 예찬 Feb 12. 2016

나 버리기(놔 버리기)

다시 태어나!

다시 태어나!


어린 시절, 특히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각자의 꿈에 대해서 발표하기도 하고 미술시간에 그림으로 그려 교실 뒤편에 전시해 놓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주로 소방관, 의사, 판사, 과학자, 대통령 등이 동심을 자극한 꿈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시절엔 해맑은 웃음과 하교 후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놀이가 세상의 전부였다.

로봇 태권 V 가방을 사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었고 미래소년 코난을 보기 위해 어머니가 요구한 숙제를 끝내고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그 기억 저편의 모습들을 이제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똑 같이 하고 있다.

터닝 메카드의 에반, 피닉스, 알타, 만 타리 등 외우기도 힘든 정의의 용사를 매일같이 세상의 전부인양 외쳐댄다.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아마도 "의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얀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환자의 몸에 대고 진찰하는 모습에서 Magic 같은 신기함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꿈과 함께 꿈을 꿨었다.


그 꿈은 시간이 지나 성장의 단계를 거치면서 미적분과 달달 외워야만 하는 역사의 연대기 속에 함께 묻혀 버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경쟁사회에 서서히 조건대로 순응하는 법을 배우며 내 안에 감추어진 잠재력은 닳아가고 있었다.

문제집과 칠판에 판서된 문제를 맹목적으로 풀어야만 했고 풀지 못하면 문제와 답을
외워야만 했다.

문제를 왜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어느덧 지워져만 갔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취업"이라는 명확한 목표 하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취업이 생의 종착역인 것처럼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등학교  때부터,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좀 더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이 모든 일련의 학습과 행동은 단 하나의 지침에
수렴되었다.

마치 태어난 이유가 취업하기 위해서 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나에게 "꿈"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취업 후에도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답만 찾아야만 했고 조건대로 순응해야만 했다.

질문 없는 삶 그 자체는 틀에 갇힌 삶을
가져다주었고 석고처럼 굳은 생각은 끼워 팔기  패키지처럼 선심 쓰듯 덤으로 주어졌다.  

틀에 갇힌 삶은 석고처럼 굳은 생각을 창조한다.

그 석고는 웬만한 둔기로도 부서지지 않는 수십 년간  담금질된 특수합금으로 특수 제작되어졌다.    

어느덧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패턴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자녀들에게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중의 행동을 쫓아가며 안정감을 찾기보다는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 삶의 가치를 자녀에게 증여하고 싶은 충동들이 반기를 들고  마음속에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정의 내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변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패턴과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은 보지 못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엑셀 함수를 이용해 복리로 계산해보고 연금저축 등 오만가지 방법으로 계산을 해 본들 주택구입과 빛 청산, 자녀교육, 노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헌신할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틀을 깨기 전에는 그 아무리 숫자를 가공을 해도 그 아무리 밤을 새워서 고민을 해 본들

한숨만 나오게 될 것이기에.     


몇 주 전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이민규 교수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시대엔 변화가 생존의 필수조건인데 대부분 인식하고 있지만 변화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를 관성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외부 충격이 없는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편과 고통을 감내할 만큼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그런대로  버틸만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세계 역사는 남들이 비웃을 정도의 꿈을 가진 자에 의해 쓰였고 지금도 만들어져 가고 있다.


신이 우리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은 분명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지
 꿈을 포기하라고 준 것은 아닐 것이다.

동물원의 사자는 원래 우리 안에 갇혀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인간이 창조된 이유는

꿈을 꾸고 실현하기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주 크게 비웃을 만한 꿈을 꾸고 실행하자!

역사에 남을 만한 꿈을 꿔서 남들이 이룩한 역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산 주인공으로

나만의 Story를 만들어 가자.


꿈이 없는 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가 저물기를 기다리는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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