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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하 Dec 31. 2021

빛과 수렁 사이

4. 하영이의 어린 시절 

하영이는 어릴 적에 만화광이었다. 시골 작은 마을 만화방이 거기서 거기이지만 하영이는 만화방 주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아이였다. 만화책이 너무 재미있고 궁금한 하영이는 작은 체구로 그곳에 비집고 들어가 만화 보는 친구 뒤에서 그 만화를 훔쳐보다 주인에게 수없이 쫓겨났다. 만화책을 빌리고 나오는 친구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보여달라고 하기도 수차례였다. 그것도 안되니 결국은 엄마 지갑의 돈을 훔쳐서 만화방에 가기도 했다.


그러니 하영이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다 저녁이 되면 부모님의 걱정이 시작될 것이니 그전에 하영이를 찾아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속 눈치를 봐야 하고 하영이는 무심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부모님은 화를 내야 한다. 나는 하영이 때문에 너무 고단했다. 

 

부모님과 하영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아니 하영이의 집안 식구 조련이 계속된 것이다. 하루는 아빠가 하영이를 심하게 혼내셨다.


"아빠, 나도 가고 싶지 않아요.. 흑흑흑.. 그런데 보는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너무 재미있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영이가 말했다. 


"계속해서 만화방에 가면 넌 내 딸이 아니다. 돈까지 훔치고 제정신인 거니? 그냥 아빠랑 산에 들어가서 죽자."

하영이는 울다 못해 쓰러져버렸다. 항상 막내라고 이쁨 받던 사랑스러운 딸이었던 하영이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렇게 쓰러진 하영이는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고, 엄마와 아빠는 허둥지둥 정신이 없으셨다. 하영이가 어떻게 될까 두려우셨던 부모님은 결국 만화방 쿠폰을 끊어오셨다. 하영이는 당당하게 만화를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영이의 승리는 나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가난한 우리 집에서 동생의 만화방 쿠폰은 내가 다니고 싶던 피아노 학원은 계속 미루어야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아무 잘못 없이 눈치를 보던 나는 이런 식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려놓아야 했다.  다른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집중할 수 있는 하영이의 그 모습이 나에게는 질투 나고 부러운 모습이다.  


하영이가 나를 크게 좌절시킨 일도 있었다. 그녀는 중학교 때 전교 1등과 2등을 달렸다. 사실 공부란 걸 거의 하지 않는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시험을 잘 봤는지 모르겠다. 매일 공부하느라 잠을 설치던 나는 그런 성적을 받아본 일이 없었기에 하영이가 너무나 부러웠다. 매일 하는 일없이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던 하영이는 어떻게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하영이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영이의 이 천재성은 나에게 또 다른 내려놓음을 배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더 좋은 학교에 하영이를 보내기 위해서 부모님은 없는 돈, 있는 돈, 끌어모아서 도시에 있는 좋은 학교에 하영이를 유학 보내기로 하셨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권유였다. 하영이 같은 아이가 공부해야 한다고 모두 이야기했다. 


문제는 그 일이 나의 진학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우리 둘을 다 감당할 힘이 없는 부모님이셨다.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셨던 부모님은 가난하셨고, 나는 재빠르게 포기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식구 모두 힘들었을 것이다. 포기하길 잘한 것이다. 

 

하영이의 너무나 큰 재능과 매일 노력으로 버티는 나의 간극은 너무나 컸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거의 좌절 수준이었다.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왜 하영이만큼 할 수 없는 것일까? 나도 하영이보단 아니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는데, 우리의 형편은 상위권의 나의 성적에도 한 명만 구원할 뿐이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이렇게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 가난이 아니면 우리가 이런 일들을 경험했을까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 가난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영이는 여전히 무언가에 빠질 수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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