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모여있다. 보기만 해도 냄새가 올라온다.
은행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다. 그날따라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준비하고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저 멀리 지하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가 막 떠나려고 했다.. 저것 마져 놓치면 진짜 지각이다. 냅다 달려서 겨우 버스를 잡아 탔다. 숨을 몰아쉬며 안심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코를 감싸쥐고 내 쪽을 흘깃거렸다. “아휴 똥냄세.....”라며 원망섞인 눈으로 날 보셨다. ‘저아줌마 왜저래?’하면서도 날 보는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의심은 맞아떨어졌다. 내 신발에 두어개의 은행이 철퍼덕 보란 듯이 붙어있었다. 난 애써 발을 바닥에 문질러 떼어내려했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냄세는 더 심해졌다. 결국 그 아줌마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결국 내릴때까지 붉은 얼굴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이후로 은행은 절대 안밟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며철 전에도 바닥을 보며 주의해 가야 할 구간을 마주했다. 마트를 갈 때 이 길이 제일 빠른데 은행은 밀집도가 높다. 정신을 딴 대 다가 두면 밟기 쉽상이다. 이 은행을 떨어뜨린 은행나무를 보니 역시 30년은 돼 보인다. 길 위에 이렇게나 은행이 많다니. 고개 들어 보니 이 은행나무엔 바닥에 떨어진 것의 10배는 넘어 보이는 은행열매들이 아직도 매달려있다. ‘가을동안 이 나무는 얘들 안떨어뜨리고 뭐했나. 왜 보행로에 이런 걸 심어놓은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주의를 집중해서 까치발을 해서 겨우 하나도 안 밟고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왠지 모를 성취감을 느꼈다.
오늘 마트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윙 소리가 멀리서 부터 들렸다. 자세히 보니 그 은행나무의 가지가 잘리고 있었다. 인부들은 크레인 차에서 가차 없이 우거진 은행의 가지를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는 가지와 함께 마지막 남아있던 은행들을 바닥에 소나기처럼 떨구어냈다. 우박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많던 은행들이 한꺼번에 떨구어졌다. 난 은행 하나라도 머리에 떨어질까 얼른 옆의 보도를 따라 마트에 갔다.
마트에서 돌아올 때는 그 길은 더 이상 옛날 길이 아니었다. 팔이 잘려나간 몸뚱아리만 남은 나무들이 억울한 느낌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길 한쪽 가장자리엔 마지막 떨어져 나간 은행들이 모여있었다. 팔잘린 나무와 억지로 떨궈진 은행들을 나도 모르게 번갈아보았다. 갑자기 이상하게도 코끝이 찡해왔다. 그렇게 내 앞길을 막았던 은행 열매였지만, 정작 앞으로 나뭇가지가 자라기 전 까지는 못 볼 생각에 뭔가 씁쓸했다. 은행나무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일거다. 자기 딴엔 열심히 힘내서 자라 열매를 맺을 뿐이었는데. 내 미래 아들 딸인 열매를 사람 맘대로 가져가거나 밟아 대더니, 이제 아예 내 팔들을 다 잘라서 이파리 없는 나무를 만들다니...... 얼마나 사람이 미울까도 생각한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파괴 그 자체다. 많은 사람에게 이로운 게 정말 이로운 걸까?
멍하게 은행나무를 보다 마트에서 장 본 물건을 든 팔이 무거워져 다시 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두 발은 아직도 남은 은행을 밟을까봐 까치발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