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음이 큰 쓸모가 된다. (Feat. 살림의 즐거움)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면서 열 배씩, 열 번 절을 하는 방법으로 절을 하면서 마지막에 나를 위한 절을 올릴 때마다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고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요즘 내가 하루 중 가장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아이가 이유식을 잘 먹을 때, 음식을 만들 때이다. 아이는 이유식을 먹을 때 얼마나 많이 웃어주는지 모른다. 맛있어서 그런 건지, 엄마랑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며 앉아있는 게 좋아서 그런 건지, 이유식 먹이면서 내가 짓는 표정이 재미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작은 입으로 아기새처럼 이유식을 받아먹는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러다 보니 이유식 만드는 재미가 붙었다. 그리고 시골에 살면서 딱히 사 먹을 데도 없고 시켜 먹을 데도 없고 맛집도 없다 보니 매일 집에서 먹고 싶은 것을 직접 만들면서 시골살이 3년 동안, 그리고 결혼 후 같이 먹을 사람이 생기면서 음식 솜씨가 제법 늘었다.
‘오늘은 어떤 재료들로 뭘 만들어먹여 볼까나.’
일단 정해지면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어떤 양념으로 음식을 만들지 궁리를 한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시간이 오래돼서 처리할 재료들이 제일 먼저 쓰이고, 힘들어서 밥 하기 싫은 날에는 냉동실에 얼려놓은 생선들을 오븐에 굽고 냉동만두를 찌거나 굽지만 가능한 신선한 재료로 하루 한 끼 정도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으려고 한다. 정말 몸이 안 좋은 날은 음식을 만들 힘도 없지만 대체로 나는 음식을 하는 동안에는 즐겁고 신난다. 나에게는 무언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또 다른 명상이기도 하다.
요즘 유일하게 밖을 나가는 게 장 보러 나가는 일인데 나에게는 장을 보러 가는 게 신나는 일 중에 하나다. 하하. 장바구니 들고 시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서 더 힘이 있다. 내가 사는 진안에는 5일마다 오일장이 열리는데 장날에는 마트가 아닌 시장에서 장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 바퀴 어슬렁 둘러보면서 스캔을 먼저 하고 그때 그때 눈에 들어오는 신선한 것들, 제철 채소나 해산물들을 주로 산다.
“이거 얼마어치 주세요” 하면 손으로 쥐어서 한가득 마음도 담아주시는 그 맛에 마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이 느껴지는 게 시장의 매력이다. 3년 전만 해도 젊은 아가씨였던 이제는 새댁으로 불린다. 자주 가는 채소가게는 ‘너무 많아요, 다 못 먹어요. 조금만 주세요” 단골 멘트가 되었다. 그러면 이모님은 두고 이것도 해 먹고 저것도 부지런히 해서 먹으라며 레시피까지 일러두시며 한 움큼 더 넣어주신다.
그렇게 채소들을 사 오면 집에 와서 손질을 하고 냉장고에 넣어놓는다. 채소를 손질할 때 내가 열심히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채소 자투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서 채반에 널어 햇빛에 말려 놓는 일이다.
시골에 내려와서 살면서부터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일인데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채소 손질을 하며 껍질이나 자투리들을 그냥 버리지 않고 모아서 햇빛에 말려 채수를 만들 때 쓰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는 다시 흙으로 가서 비료가 되고 땅을 건강하게 하고 다시 그 땅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열매를 맺고 내 입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다고 느껴졌다.
내가 먹는 대부분의 것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커피 찌꺼기는 말려서 흙에 뿌려주면 천연 비료가 되었고 채소들은 썩으면서 거름이 되었고 요즘은 아이 이유식을 만들면서 쓰는 소고기 핏물은 물과 희석해서 화초에 뿌려주면 화초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쌀을 씻은 물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찌개나 국을 끓일 때, 화분에 물을 줄 때, 세수를 할 때 쓰면 피부도 좋아진다.
누군가는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쉽게 버리는 것들이 나에게는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쓰인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해서 제 쓰임을 할 때 무척이나 기쁘고 즐겁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풀타임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열심히 쌓아 올렸던 나의 일과 커리어들이 다 무너진 것만 같아서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 왜 여자만 이렇게 희생을 해야 되는 건가’
‘ 아이가 크면 다시 내가 좋아했던 일들을 할 수 있을까?’
‘ 대체 난 뭘 잘하지’ ‘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 시장에서 장을 보고 채소 자투리를 말려서 채수를 만들고 이유식을 만들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면서 문득 어이없게 깨달은 사실은
내가 살림하는 것을 꽤나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와 전업주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고 돈을 버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데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를 돌보는 이 시간이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채워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채소 자투리가 모여 푹 끓이면 깊은 맛이 베어 나오듯이 나의 이 시간들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깊은 쓸모가 있으리라 믿는다.
자세히 바라보고 매 순간 정성을 다하면 쓸모없는 것은 없고 쓸모없는 시간은 없다. 다 제 쓰임이 때가 있을 것이다. 좋은 때를 만나고 좋은 인연을 만나면 각자의 역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냥 버려질 수 있는 채소 자투리도 정성껏 씻어 말려서 우려내면 모든 음식에 깊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하듯이 그냥 버려질 수 있는 이 육아의 시간에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해 정성껏 무언가를 하면 어느 순간 그 시간들이 모여 내가 필요한 곳에서 더 깊은 맛을 낼 것이다. 108배의 절이 모여, 108번의 번뇌를 녹여, 더 깊고 맑아지기를. 한 번에 강한 맛을 내는 고기 국물보다 정성과 시간을 내어 만들어야 되는 채수처럼.
살림, 살리는 일, 엄마는 결코 하찮고 시시한 일이 아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인정해주지도 않고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퇴근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이 세상 어떤 일보다 나는 가치 있고 멋있고 고귀하고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 또다시 힘을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생기이든, 활력이든, 밥벌이 수단이 되는 능력이든.
나는 살림을 꽤나 좋아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엄마가 돼서야 알았다. 물론 어떤 날은 노동으로 느껴지고 희생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내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즐겁게 해온 일이 밥을 짓고 함께 먹고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때 기쁨과 보람을 크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식당을 열까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밥을 하는데 에너지를 쏟다 보면 집에 와서 내 가정을 돌보고 밥을 짓는 게 일처럼 느껴질 것만 같아서 먼 훗날 텃밭과 숲이 있고 몇 개의 독채를 지어 사람들이 놀러 와서 함께 텃밭과 숲을 가꾸고 함께 신선한 재료들로 건강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야외 부엌과 겨울에는 불을 쬘 수 난로가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상상을 해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돌보는 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겨우내 거름들로 건강해진 땅에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씨를 뿌리고 여름과 가을에는 풍성한 행복과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란다. 나는 또 그 열매들을 채반에 널어 햇살을 마실 때마다 행복해하고 있겠지. 지금처럼-
쓸모없는 것들의 총집합이
오늘 우리의 저녁을 멋지게 만들어줬다.
아이는 이유식을 뚝딱 해치우고!
이게 엄마의 기쁨 아니겠는가.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신나게 하자.
하기 싫은 날은 잠시 쉬어도 좋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어야
무언가 하고 싶은 날에 즐겁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테니!
내가 하는 일이 놀이가 된다면
배움도 있을 터이니.
어쨌든 입춘이다.
봄이 오면 씨 뿌릴 생각에 요즘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