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낱말이고 진실은 문장이다.
사실과 진실. 이 둘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때론 삶을 가르고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틈이 숨어 있다.
사실은 ‘일어난 일’이고, 진실은 ‘그 일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것이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진실은 각자의 시선과 맥락 속에서 다르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한 소년이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교실을 나섰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 놓고 본다면, 그는 성의 없는 학생일 수 있고, 포기한 아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아버지가 병원에서 생사의 경계에 있었고, 소년은 시험지를 들고 교실에 앉아 있는 것조차 숨이 막힐 만큼 힘겨웠다고 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눈으로 그 장면을 보게 된다.
그제야 사실은 맥락을 입고, 진실이 된다.
사실은 낱말이고, 진실은 문장이다.
사실은 정지된 이미지고, 진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영상이다.
우리는 종종 그 이미지를 보며 판단을 내리고, 그 문장을 읽지도 않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서 진실은, 종종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 숨어 있다.
누군가가 "나는 괜찮아"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피하지 못한 눈동자,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 담긴 수많은 단서들, 그것이 진실을 말해준다.
진실은 언제나 말보다 깊고, 숫자보다 조용하며, 이성보다 감정에 가까이 있다.
진실은 대개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사실만을 말한다.
사실만 말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고, 감정을 외면할 수 있으며, 복잡한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진실을 모른 채 내리는 판단은, 누군가의 내면을 오독하게 하고, 어떤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나는 요즘 진실을 더듬는 연습을 한다.
어떤 말보다 그 말이 나오는 자리, 어떤 행동보다 그 행동이 자라난 시간, 어떤 표정보다 그 표정을 만든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쓴다.
그것은 한 사람을 전체로 보는 일이고, 동시에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은 눈으로 보고, 진실은 마음으로 듣는다.
사실은 수치로 기록되지만, 진실은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조심스럽게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안에 담긴 진실의 온기를 느껴보려 한다.
그리고 바라본다.
언젠가 이 세상이, ‘사실’만이 아닌 ‘진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침묵과 맥락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그 가느다란 빛을 따라 서로를 더 다정하게 바라보는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