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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쉘위 Jul 13. 2020

원순 씨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진실이 치유한다

화가 나고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사회운동을 하고 정의를 외치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서 안타까운 부분 중에 하나는  국민의 행복과 복지를 논하면서 개개인의 사소한 삶의 행복과 스스로 개인의 삶을 충만하게 가꾸고 사랑하는 사람과 애정을 보내고  저녁을 가족과 함께 같이 먹으며 주말에는 마음껏 쉬거나 충전을 하거나 개인의 취미를 즐기면서 삶과 일의 균형과 에너지를 분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자신의 일터나 자신과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소홀히 하다 보니 온전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주위에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의 약점이나 치부를 들켜서는 안 되고  대의적으로 멋지고 정의롭고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멋지고 대단하다고 칭송하며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이라서   있는 일이라며 그의 옆에서 듣기 좋은 달콤한 말만 한다. 하지만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질리고 좋은 말에 취하다 보면 진실된 말을 들을  있는 능력은 퇴화되고 진실된 관계를 맺는 게 어려워진다. 특히나 정치적이고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상대가 기대하거나 바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회적 가면을 쓰고 적당히 속내를 보이고 아니 속내를 감추며 심층이 아닌 표층적인 관계만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헛헛한 마음이 이들에게 항상 존재한다.

나는 도시에 있을  이런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일을 했었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기를 바랐고 나는  역할을 아주 충실히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쉽게  앞에서 무너졌었다.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나와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나는 항상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했다. 나는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기에 공과 사의 구분을 완벽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항상  부분을 모호하게 했다. 결코 쌍방의 건강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인간적으로 호기심이 있거나 궁금하지 않았다. 나의 질문은 치유를 위한 상담 과정의 하나였을 , 인간적인 호감이나 궁금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쉽게 보여준  없는 사람들은 한 번의 경험에서 오는 자유와 해방감으로부터 자신을 무장해제시킨다. 문제는 그것이 일 방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나 감정이나 생각들을 쉽게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내담자일 , 친구도 지인도 아니기 때문에 철저히 삶에서 분리시킨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도  삶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상담자가 내담자와의 상담 후에 일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상담자의 삶도 고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은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벗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누구나 그런 바람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찌질함과 내 안의 변태스러움과 내 안의 여러 가지 욕구를 솔직하게 하고 보여줄  있는 그런 관계.


보통 마음을 나눈 진실된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 가능한 그런 관계.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고 떳떳한 관계에서 오는 내면의 건강함과 세상의   사람이라도 나의 구질 구질하고 못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줄  있고 진실되게 연결되었다고 느끼는  내면의 충만감이 단단하게  속에서 자리 잡을  삶은 안정감이 있다.

20 후반 때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기구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했었다. ‘ 진정 세계평화를 위해?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취업하려는 이유인가?’  국제기구에 입사를 해야만 세계평화를 위해 일할  있는 건가? ‘ 그렇게 매일, 매일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이런 질문이 나왔다. ‘ 지금 나는 평화로운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답을 붙잡고 꿈을 향해 달려가면서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니 나는 자신 있게 평화롭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나는 세계평화의 화두에서 ‘내면의 평화 화두를 전환했다.  삶이 평화롭지 않은데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자명해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인 삶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나면의 평화를 위해 나의 내면 작업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삶은 무엇인가? ‘ 답을 찾아가는. 그리고  여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나를 구하지 못하고  자신을 변화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혁명을 한다는 말인가. 자기 혁명이 없이 세상을 개혁하고 혁명한다는  자체가 실현되지 못한 공약처럼 아무 힘이 없다. 정의를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생명을 말하고 정치를 말하기 전에 진실되게 서로 사랑하고 자신의 삶과 생명을 소중히 하고 자신의 잘못과 실패도 인정하는 인간적인 용기가 정말 스스로에게 인간적인 삶을 허락하는 인권이 아닐까 싶다.

말이 많고  때문에 피로감이  쌓이는 시기라  한마디가 조심스럽지만 지금  순간 우리가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깊게 소통하고 눈마주치며 진실되게 사랑하는 . 물론  영혼에게도 항상 진실되는 . 진실을 말하기 전에  순간 자신에게 진실되게 행동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속여도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괴로운 삶은 없을 테니.

결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반쪽짜리 평화와 반쪽자리 사랑이 있는 삶을 살지 말자.  치열하게 싸워서 우리가 지켜야  것은 온전한 평화와 사랑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온전한 삶을 이룰 것이다. 가짜 평화와 거짓을 파헤치고 숨어있는 어두움을 부수고  부서서라도 아프고 힘들어도   평화와 사랑을 위해 직면하고 대면해야 된다. 나에게 사랑이란 말랑말랑한 완전한 단어가 아니라 정확하게 분노하고, 불화를 회피하지 않으며, 끝까지 대면한 후에야 가능해지는 변화이 가능성이자 공존의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이야 말로 무엇보다 정치적인 행위다.

어쨌든  또한 여전히  사랑을 배우기 위해  지구에 왔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위해 전쟁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이 있었기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전쟁을 잠시 중단할 수는 있어도 전쟁을 피하는 삶을 살아가면 영혼의 공허함은 평생 짊어지면서 살아가게  것이다. 그리고 평생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헛된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하거나 마구잡이로 배를 채우거나 술과 마약에 취하거나 소비를 하거나 무언가에 중독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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