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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200억 대작에 똥줄 타는 초보 스크립터

(안부귀영화2) 스크립터가 하는 일_프리 프로덕션

by 초별


아카데미 졸업을 아직 하지 않았던 2019년 2월, J 감독님이 대작을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력서와 함께 스크립터 지원 이메일을 보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사무실은 상당히 휑한 공간이었다(알고 보니 초기라서 그랬고, 나중에 스태프들이 하나 둘 출근을 하며 점점 사무실처럼 바뀌었다). 한쪽 구석에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거기에 J 감독님이 계셨다. 그러나 나는 조감독님과 면접을 봐야 해서 어색하게 인사만 했다. 다른 현장도 조감독이 스크립터까지 뽑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아마 감독과 조감독의 관계에 따라 케바케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조감독님이 J 감독님의 데뷔작부터 함께 했던 관계라 스크립터 채용까지 맡으셨던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면접을 위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조감독님은 상대방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별로 무섭거나 기죽거나 쫄지는 않았다(메롱). 대화가 시작됐는데 조감독님이 말하셨다.


“감독님이 이력서 한번 받아보라셔서 받은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메리트는 없어요. 스크립터랑 연출팀 구인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약간 비장한 느낌으로 말하셨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의아했다. 거기에 덧붙이신 말씀이 본인은 이력서에 감독님 팬이라고 적은 사람들을 안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음… 이럴 수가. 나도 이력서 끝에 구구절절 내가 얼마나 감독님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적었군. 그러나 그건 합격하고 싶어 아부를 떤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도 판타지 터치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그런 톤의 영화일을 해보고 싶었던 게 1순위였기 때문이다.


조감독님과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조감독님은 이번 영화는 그동안 한국에서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SF영화라 특히 더 도전적이다, 그래서 더욱 수준급의 스태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스크립터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불합격이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덧붙이셨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외국인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영어실력이 꼭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자기도 이번에는 원래 구인구직 하던 방식(인맥)으로 사람을 구하기보다는 필름메이커스뿐만 아니라 상업영화 스태프 밴드(네이버 밴드가 있다)에까지 구인 글을 올린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미 탈락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렇게 말하시자 갑자기 나에게 엄청난 기회가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의 주특기인 뻥튀기를 시작했다.


“그렇군요…! 근데 저 영어 잘합니다. 아주 잘해요. 베리베리 굿~ 유놔람쌩? 아엠 원어민 수준~ 알유오케바리바리아엠파인땡큐앤쥬~?“


으흐흐흐흐. 죄송합니다 조감독님. 제 영어가 원어민 수준은 아니라는 걸 이미 아시겠지만 당시에는 저에게 낚이셨습니다. 나는 그때 영어는 전혀 문제없는 척하면서 스크립터 일은 정말 열심히 배우겠다고, 잘할 수 있음을 어필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대화가 잘 흘러갔고 심지어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 보니 조감독님은 그냥 인간적으로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껴졌었다. 왜, 사회 생활 하다 보면 그런 걸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지 않나.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은 나랑 친해질 수 있는 부류다 아니다 하는 것 말이다. 조감독님은 나와 비슷한 성향이었고, 그래서 술술 이야기가 잘 됐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내가 상업영화 스크립터라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8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조감독마다 우선순위로 따지는 것이 다 다르겠지만… 일단 감독님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조감독님이 보기에 내가 스크립터를 하면 감독님과 같이 일할 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던 게 아닐까…?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면 다를 수 있음. 그러나 당사자 입장은 난 몰?루! 조감독님, 불만이면 카톡하셈). 여튼, 나는 조감독님 덕분에 소중한 스크립터 경험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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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편파적이고 제멋대로 해석한 영화제작 과정입니다. 혹시나 저를 아신다면 (제발) 모른척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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