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매번 돌진하라 마치 성공할 것처럼
아직 후반 작업을 하면서 사무실에 출퇴근을 하던 때, 갑자기 J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초별아. 나는 다음 주부터 시나리오를 쓸 거야”
“오 그래요? 쓸 시간이 있으세요? “
“시나리오는 시간이 있어서 쓰는 게 아니야. 시간을 만들어 쓰는 거지. “
“아~ 그렇구나(영혼 없음)”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너도 쓰라고 그러는 거야.”
“네 저 안 그래도 내일부터 쓰려했어요(진심이었음ㅋㅋ)”
“그래? 그럼 시나리오 써서 서로 보여주자.”
“오 좋아요. 언제까지요?”
“오늘이 1월 9일이니까. 2월 9일까지.”
“헐 그건 너무 빨라요”
“야 초고는 빨리 쓰잖아”
“감독님은 그래도 저는 아니에요 한 달만 더 주세요 “
“안돼. 2월 9일까지. 못 쓰면 50만 원”
“허얼… 50만 원…”
(못 낼 것 같이 큰돈이 걸려 있으면 정말로 쓰게 된다는 걸 이전 시나리오 학원을 통해 배웠음)
“아 근데 50만 원 너무 큰데. “
“그럼 백만 원.”
“아니 50도 크다고요!”
“돈이 커야 쓰지. “
“그럼 감독님 백만 원, 저 50만 원 해요. 불공평하니까.”
“그래.”
결국 50만 원, 100만 원을 걸고 장편 시나리오 초고를 쓰기로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카페에 가 작업을 시작했다. 9시 출근 전까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걸고 드디어 시나리오 작업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런 기세를 몰아 2월 9일에 나는 시나리오를 완성했느냐!!!!!(느낌표로 오버 중) 하하하하하! 그!럴!리!가! 감독님은 그럼 완성했느냐? 그!럴!리!가! (감독님은 좀 쓰신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이 내기로 인해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50만 원이나 걸려있고, 혼자 데드라인을 정한 것도 아니고 같이 정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참 시나리오란, 이렇게나 쓰기가 힘든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장편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면 뭐 어때. 쓰면 쓰는 거지. 시나리오는 기세야!'(응? 정말?) 하는 마음으로 새벽 5시부터 카페에 가서 일단 뭐가 됐든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중반 즈음…부터 작업일지가 멈췄다. 왜 멈췄느냐? 기세보다 더 파워풀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름은... '습관.' 특히 '글 안 쓰는 습관'이었다. 습관의 힘은 정말 무섭다. 우리는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만이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안 하는 것도 습관이다. 따라서 나처럼 원래 글을 안 쓰는 습관이 들어있는 사람은 일단 새로운 습관부터 들여야 한다. 매일같이 조금씩 (무조건) 쓰는 습관. 나 같은 초짜 작가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의지'와 '다짐'만으로 글은 절대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나리오는 '글 쓰는 습관'이 써주는 것이라는 것을. 아, 예외의 경우가 하나 있다. 칼 든 강도가 써주기도 한다. 제발 누가 칼 들고 나를 협박해 주면 좋겠다. "너! 시나리오 안 쓰면 죽여버릴 거야!" 그러면 진짜 매일같이 어마어마한 분량을 뽑아낼 텐데... 휴...
하여튼 이렇게 나도 후반작업을 하며 감독님과 내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려고 끄적끄적거렸지만 결과는 딱히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후반작업 일이 마무리되며 정말로 상업영화 첫 스크립터 일이 끝났다. 그런데 일이 끝나자 또 아니 이게 마침말이야 하필이면 이럴 수가 세상에나말이야 매일 사람 기분 좋아지는 날씨 좋은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글을 쓰지 않을 이유는 무한대로 많고 글을 써야 할 이유는 딱 하나(내가 하고 싶었으니까)뿐인 슬픈 현실이란). 나 같은 의지박약 닝겐은 가을을 즐겨줘야 했다. 그때가 코로나가 터진 2020년이었다. 아직 한창 코로나가 퍼져가고 있을 때, 나는 일도 끝났겠다 부모님과 사람 없는 가을 숲 속 캠핑을 다니면서 즐겁게 룰루랄라 놀았다. 놀 때는 시간이 왜 이렇게 쏜살같이 화살같이 빨리 가는지... 흥칫뿡. 그러다 잠깐 정신을 차리고 이번엔 진짜 진짜(두 번이어야 함) 시나리오 좀 써야 하는데… 생각하고 보니 아니 이럴 수가(맨날 이럴 수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장편제작과정 모집을 시작한 게 아닌가! 이 타이밍은 무엇? 이것이 나를 뽑아주겠다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어떤 것에 도전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주인공이 된 척 오버하는 태도다. 나는 무언가에 지원할 때 놀랍게도, 내가 안 뽑힐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공고문(공모전이든, 입학 지원이든)을 보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마치 후반 작업 때 믹싱실에서 영화감독이 어떤 컷을 보고는 "주인공 심장 뛰는 사운드 효과 좀 잘 들리게 넣어 주세요"라고 말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일본 청춘만화처럼, "도전이 시작됐다." 하는 마음속 나래이션도 추가한다. 그렇게 나는 내 영화 속 주인공이 됐다.
의아하실 수도 있다. 아니, 이 사람은 맨날 글에서 자기가 못하네 한심하네 어쩌네 했으면서, 그건 다 거짓나부랭이였나? 욕먹을까 봐 괜히 겸손한 척했던 건가? 타당한 의문이다.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내가 나를 "못났고 못하는 한심한 닝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도 그 생각은 늘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