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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시나리오 수정과 알콜중독의 상관관계

자아분열의 과정

by 초별


좋은 시나리오란 무엇일까?


시나리오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초고, 수정고(수정12345등등고), 슈팅고, 최종고, (심지어) 출판고도 있다. 지금까지 여러 단계의 시나리오들을 읽어봤다. 유명 시나리오의 출판고는 출판이 된 것이기 때문에 구해 읽기가 쉽고 초고, 수정고는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열심히 발품 팔고 운이 따라주고 (내가 착하게 살아왔거나 인맥이 있거나)그러면 구해서 읽을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부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시나리오는 별로인데 영화가 좋게 나온 경우는… 거의 많지 않고, 영화보다 시나리오가 더 좋은 경우들이 꽤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최종고보다 초고가 좋은 경우도 있다. 시나리오 수정이란 더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인데… 어쩌다가 수정을 하면서 안 좋아진 걸까?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시나리오가 수정을 하며 망가져버리는 이유들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거대 자본이 들어간 영화일 경우 그 이유는 십중팔구로 ‘사공이 많기 때문’이다. 거대 자본이 들어갔다는 말은 투자사가 여럿일 수 있다는 얘기고, 제작사, 투자사에서 이건 이렇게 고쳐라, 저건 저렇게 해라 등등 잔소리가 많을 것이다. 그뿐이랴. 배우 파워가 최고가 된 요즘에는 배우들도 이 부분은 이렇게, 저건 저렇게 고쳐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의견을 (어쩔 수 없이) 다 반영하다 보면 시나리오는 망가진다. 이것을 전문용어(ㅋㅋ)로 우리는 “너덜너덜해졌다”라고 한다. 가엾은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져 버린 것이다.


아카데미 장편 제작과정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의 장점은 그런 사공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물론 사공이 있긴 하다. 무서운 교수님들. 교수님들은 우리의 시나리오를 (갈비도 아닌데) 정말 열심히 물고 뜯어주신다. 냉철한 비판과 가혹한 평가를 하시면서 이건 절대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이 캐릭터는 이게 뭐냐 말도 안 된다, 저 캐릭터가 한심하고 불쌍하다, 지루해서 낮잠을 잤다, 개연성은 집에 놓고 왔냐 등등 온갖 욕설을 던지신다. 그런데 왜 사공이 없다고 말했는가… 하면 내가 깡만 있다면, 배짱만 있다면 그 교수님들의 말을 싸그리몽땅 무시해 버려도 되기 때문이다(아카데미가 이 글을 싫어합니다).


제작사와 일을 하게 되면, 투자사가 생겨버리면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무시해? 그러면 니 돈으로 영화 찍어!” 할 것이기 때문에. 영화판에선 돈이 권력이다. 시나리오는 작가, 연출이 수정하는 게 아니라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그 누군가가 한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정부 산하 기관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정부에서 돈을 주는 것이다. 그 말은? 교수님들이 아무리 열심히 ‘너 이거 고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하고 칼을 들고 쫓아와도, 내가 뻔뻔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막말로) 교수님들이 돈 주는 게 아니니까! (아카데미가 이 글을 싫어합니다22)


쉽게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교수님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면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협박 시스템(?)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 우리 조언 반영해서 제대로 고치지 않고 계속 마음대로 한다면, 통과 안 시켜줄 거야. 너 영화 못 만들게 될 거야”라고 협박하신다. 통, 불통 제도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 교수님께 아부도 좀 떨어야 한다. 교수님 말도 좀 들은 척하고. 반영해서 고친 척도 하고. 그러면서 일단 크리틱을 통과하고 나면, 나중에 촬영 직전에 존나 제멋대로 버전의 시나리오를 꺼내와서 그걸로 찍어도 된다! (아카데미가 진짜로 이 글을 싫어합니다333)


물론 그만큼 내 생각에 확신이 있고, 잘 찍을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다. 그렇게 멋대로 했는데 영화제를 휩쓸고, 칸에 가서 상을 받아버리면 교수님들도 박수를 치신다. 그래. 쟤는 쟤만의 그것이 있구먼! 예술가여 예술가~ 그러나 영화제를 하나도 못 가고, 칸도 못 간다? 그럼… 좆되는…


나는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천재도 아니고, 그렇게 내 생각에 자신이 있지도 않기 때문에 교수님들의 조언이 절실했고 필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내가 교수님들의 말을 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또 아니다. 이게 참 연출로서, 작가로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힘든 점이다. 교수님들의 말이 정말 필요하고 좋고, 도움이 되는 때도 있는데 어떤 때는 무시하고, 내 멋대로 해야 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남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는 타이밍과 내 의견을 밀어붙여야 하는 타이밍은 시나리오를 쓸 때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과정 내내 계속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나는 <타협과 관철의 줄다리기> 라고 부른다(내 맘대로 붙인 이름임). 이것이 연출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는 시나리오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내용은 다음 편에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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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편파적이고 제멋대로 해석한 영화제작 과정입니다. 혹시나 저를 아신다면 (제발) 모른척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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