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후반작업
2022년 11월 중순, 영화 촬영이 끝났다.
조금 쉬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빨리 편집해야 하는데… 하면서 드디어(?) 코로나에도 처음으로 걸렸다. 원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몸이 알아서 병을 미뤄준다더니 진짜 그랬나 보다. 촬영 끝날 때까지는 절대 아파선 안돼! 하면서 잔뜩 긴장한 채 살았더니 감기 한 번을 안 걸렸었는데, 코로나도 거의 다 지나갔을 무렵 코로나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또 골골대고 그러면서 2022년이 지나갔다.
2023년 1월부터 5월은 편집만 주구장창한 시간이었다. 아카데미 장편과정의 장점이자 단점은 보통의 장편 영화 제작 기간보다 많은 기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왜냐면 장편연구과정이기 때문. 아카데미는 (특히) 코로나 이후 저예산 장편 영화를 그 어떤 제작사 보다 많이 뽑아내고(?) 있는 제작사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교육기관이다. 그래서 우리 연출들은 연구생이라고 불린다. 그 말은 무엇이냐. 다른 일반 제작사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저예산이니까) 한두 달 촬영(예산에 따라 다르지만 20-30회차 이내), 몇 달 후반 작업 하고 끝낼 수도 있을 영화 제작 과정이 한없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연구생으로서 배움의 과정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프리도 몇 달간 시나리오 피드백을 하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고, 편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1월-5월 정도, 반개월을 편집만 붙잡고 있으며 매달 편집 크리틱을 했다. 여러 선배 감독님들이 멘토로 붙어서 멘토링을 해주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이 얘기가 좋게 들릴 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끔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 장편과정에 들어오는 연출들의 경우 신인이긴 하지만 이미 상당한 경력, 수상력을 가진 연출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저예산 영화를 투자받고자 하는 생각으로 지원해 들어오기도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시나리오나 편집본을 가지고 몇 달에 걸쳐 선배 감독님들이 피드백해주는 시간이 전혀 원치 않는 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내 소중한, 아직 벌거벗은 느낌의 시나리오/편집본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보여주기 싫기 때문에 고르고 골라 피드백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학교에서 선정한 (그러나 생판 모르는) 선배 감독님들이 피드백해주신다고…?
그러나 싫든 좋든 아카데미 장편 연구 과정에 들어온 이상, 규칙을 따라야 한다. 만약 너무 그 시간이 고통스럽다 하면 '듣는 척하면서 안 듣기', '따르면서 안 따르기'를 하면 된다. 이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대신 그만큼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야 한다. 확신이 있어야 하고. 사실 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 사실이니까. 아직 그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물고 뜯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들어왔다 나간다는 생각으로 그냥 나는 뚝심 있게, 내가 생각한 것을 고수하며 밀어붙여야 한다.
나는 (이제쯤 다 아시겠지만) 그런 연구생이 아니었다. 나는 연구생은커녕 아직도 계속 학생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문제인 연출이었다. 내가 너무 부족하게만 느껴지다 보니 감독님들이 해주시는 피드백이 너무나 소중했고, 그 말들을 최대한 받아들여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별로 반발이 없으니) 좋아할 만한 연구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고분고분 아카데미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영화가 또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너무 당연한 얘기다). 결국 연출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것은 타협하고 어떤 것은 관철하며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멋지게 빗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드는 생각은, 이 권위자(?)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닌가는 내 돈으로 내가 투자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제작사와 영화를 찍든 늘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심했으면 심했지 아카데미보다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제작자와 연출가들이 같이 작업하다가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연을 끊기도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나.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제작사 대표를 설득시키고, 설득시키는 것이 실패하면 말을 듣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내가 붙잡을 것은 또 붙잡고 있고, 반영한 척하면서 내 맘대로 찍어보고… 그리고 정말 좋은 의견들은 반영하고… 하는 그 과정은 영화라는 종합예술(이자 거대 자본 예술)을 하는 연출이라면 당연히,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카데미 장편 시스템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징징대는 것은(내가 그랬음) 그야말로 아직 아마추어라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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